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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제사를 지낸 사당, 국사당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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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험한 산신을 모아 나라의 안녕을 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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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예로부터 초등학생들의 소풍명소로 인기가 높았다. 근현대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지금은 사라진 야외음악당 주변을 소풍의 주요 도착지로 삼았고, 고학년들은 남산의 정상에 있는 팔각정까지 계단을 밟고 올라가곤 했다. 아이들은 팔각정까지 걸어서 도착하고 나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관에 놀라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로서는 현재 팔각정이 있는 곳에 국사당(國師當)이 있었다는 사실과 국사당이 도대체 무엇을 하던 곳이었는지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국사당터는 경관이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정자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한양을 수도로 정한 다음해 국가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남산과 북악산에 산신(山神)을 모셔놓았다. 남산 정상의 동쪽 넓은 터에 산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을 국사당, 혹은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특히, 국사당이라는 명칭은 태종 때 3신인 천신(天神), 산신(山神), 수신(水神)과 태조 이성계, 무학대사 등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간단히 말해서 국사당은 산신을 모시고 국가의 제사를 지낸 장소라는 얘기다. 남산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졌다. 인경산(引慶山)과 열경산(列慶山)이라는 이름이 산세나 모양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면, 목멱산(木覓山)이라는 예정의 명칭은 국사당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1395년(태조 4) 12월에는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작하였는데 남산이 목멱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산 위에 목멱신사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시 중구 예장동 8-1에 위치한 국사당터에는 현재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다. 팔각정 옆에는 1985년 10월 17일 중앙일보사가 창간 20주년을 맞아 85타임캡슐을 매설하였는데 2485년에 개봉될 예정이다. 한편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정상의 길에는 우리나라 삼각점의 기준점인 진위도원점이 표시되어 있다. 국사당에서는 조선 말 고종 때까지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다가 폐지되었는데 구 후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되었다. 이 후 국사당은 1925년 일제에 의해 헐려 현판과 사당 일부가 현재의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서쪽 기슭 선바위 아래로 옮겨왔는데, 남산에 있을 때와 동일하게 지었기 때문에 옛날 모습과 같다고 한다. 현재 당의 구조를 보면 한옥으로 3칸의 맞배지붕이며 전면은 약 20m이고, 측면은 9m 정도이다. 국사당에 있는 무신도는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무신도 21점, 명두 7점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무신도 가운데 12점은 조선시대 말기에 같은 작자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인데 화원급(畵員級) 수준의 격조 높은 그림이다. 이들 무신도는 무속의 복합적이고 풍부한 신(神) 관념을 구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나머지 무신도는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왕산 국사당에 모셔져 있는 신상(神像)의 배열을 보면 정면 왼쪽부터 삼불제석ㆍ무학대사, 두 칸 건너 강씨부인ㆍ호구아씨ㆍ최영장군ㆍ별상님이 있으며, 좌측에는 나옹님ㆍ칠성님ㆍ용궁님ㆍ민중전이 있고 우측에는 산신님ㆍ태조 이성계ㆍ단군님ㆍ신장님ㆍ곽곽님ㆍ창부씨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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