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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3차 솔나불:왕산필봉산, 고사성어-西施嚬目, 城狐社鼠

정자 솔 2018. 12. 1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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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山筆峰山登攀(왕산필봉산등반)♣♡* 
 
왕산과 필봉산 등반

 名取王山擬讓王:명취왕산의양왕
筆峰形意號兼商:필봉형의호겸상
望京臺史顯忠節:망경대사현충절
柳義泰墟添觀光:류의태허첨관광
程適途迷堪體力:정적도미감체력
遠圖近景假文章:원도근경가문장
猝寒雖有持身脅:졸한수유지신협
痼疾林泉不勝當:고질임천불승당
왕산이란 산 이름은 양왕에서 취함 같고
필봉산은 모양과 뜻 겸했음이 짐작된다.
망경대 역사 흔적 충절고장 드러내고
류의태 자취 시설 관광자원 보탰었네.
거리 적당, 길도 좋아 체력에 알맞은데
먼 그림, 가까운 경치 문장을 빌려준다.
갑자기 닥친 추위 몸가짐을 위협하나
자연 즐기는 고질병은 당해내지 못하노라!
    2018. 12. 9.


 *♡♣왕산과 필봉산을 오르고♣♡* 

구형왕릉-망경대-망바위-소왕산-왕산-여우재-필봉산–광구계곡-동의보감촌 

2018년 12월 9일 일요일.
백두대간사랑회가 이 해 마지막 산행으로 산청의 왕산을 다녀와서 총회를 하게 됨에서 
포항종합운동장에서만 버스를 타게 하고 있는 바나 정회원이 아닌 나로서는 먼 밤길을 
저녁 먹으러만 가는 꼴 밖에 되지 않은지라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처신도 생각되어
 미리 연락을 하고 고속버스 나들목에서 타고 내리기로 한다.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추위라 옷을 챙겨 입고 17시에 집을 나와 승용차를 주차해두고 
돌아와 기다리는데 날씨가 차다.
  곧 도착한 버스에 올라 달리다가 07시 55분에 청통휴게소에 들려 아침을 먹는데 
미역국에 새알심이 듬뿍 들어 배불리게 한다. 
  09시 09분에 함양휴게소에 들렸다가 산행 들머리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어간다.
 단체촬영을 하고 곧 산행이 시작 되는데 뒤처져 천천히 걸어 구형왕능에 도착하니 
10시 15분이다. 
 돌무더기 이른바 석총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구형왕(仇衡王), 혹은 구해왕(仇亥王)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다. 다른 이름은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532년 음력 9월 
신라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오니 왕이 친히 맞서 싸우려 했으나, 군사적 열세로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 동생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신라로 들어가 항복을 하였다. 
구형왕의 항복 연도는 532년[1]이라고도 하고, 562년이라고도 하는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은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기도 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년)조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따르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 무도(茂刀), 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김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김유신은 무력의 손자이자, 구형왕의 
증손자로 신라삼국통일(三國統一)대업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여기서 사진들을 담고 오르는데, 백년초와 신부회장, 김 감사 등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하며 사진 촬영도 주고받기로 한다.
  11시 08분에, 고려 공양왕 때 ‘농은(農隱) 민안부’ 선생이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고 이곳 산청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며 이 바위 위에서 개경(開京) 쪽을 
바라보고 절을 하고 고려를 그리워했기에 후세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칭찬하면서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붙였다는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사진을 담는다.
  11시 50분에 망바위 전망대에 올라서니 맑게 개인 하늘아래 드러나는 조망이 흥취를
 돋우는 지라 천지를 부앙하며 지름시조 한 가락을 토해내니 정순재 산대장 말처럼
 산에 기가 센지 목소리가 맑고 높게 터져 나온다. 
  춥던 날씨도 풀리고 바람도 고요해져 여기서 점심을 먹게 되는데, 
아예 집에서 비빔밥을 해서 온 바라 따뜻하기는 해도 목메던 차에 
따끈한 라면 국물이 물통을 열지 않아도 되게 한다.
  12시 25분에 일어나 곧 가짜왕산(지금은 소왕산으로 표석을 바꿔 설치해 
놓았다)에 올라서서 멋도 부려본다. 
  12시 43분에 노송을 판자로 둘러싸 자리를 만들어 놓은 쉼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다른 팀 옆을 지나 12시 52분에 왕산(王山) 정상(923.2)에 올라선다. 사방에 둘러싼
 조망은 이태백이 춘야연도리원서에서 대괴가아이문장(大塊假我以文章-
우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준다)고 말한 바로 그것이다. 
 지리산 천왕봉을 산 아래 멀리서는 아득하게 솟은 희미한 봉우리만 볼 수 있었고,
 올라서서는 바위뿐인 모습이었는데, 여기 올라 바라보면 부르면 대답할 것 같은 
지호지간 거리에서 웅석봉과 능선 이어진 옆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어
 더욱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13시 18분에 여우재에 내려섰다가 필봉산을 오르는데, 처음은 완만하나 곧 가파른
 바윗길이 숨차게 한다. 오늘은 껴입은 옷이 날씨가 풀리면서 오를 때는 땀이 나기도 하나 
벗지 않고 속도만 늦추어 여유롭게 천천히 올라 필봉산 정상에 올라서니 13시 30분이다. 
 이 산에 처음 올랐을 때가 10년은 훨씬 넘은 것 같다. 고인이 된 최성호 선배를 
비롯해 함께 올랐던 근원, 덕암, 만송 후배 등이 지금은 같이 할 수 없게 됨에서
 금석지감이 일기도 한다.
  필봉산(848m) 정상은 온통 바위투성이로서 사방이 날카로운 벼랑 이며 주변 조망이 
일품이다. 멀리서 보면 여자의 젖가슴 같다하여 일명 유두봉(乳頭峰)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봉우리요, 바위가 빚어내는 배경이 좋은지라 떠날 줄을 모르고 
사진 담기에 열을 올린다.
  여기서 내리는 길은 바위 길이요 경사가 심해 천천히 조심해 내려야 하고, 돌길이
 끝나면서부터는 낙엽 속에 얼음이 있어 미끄러지기 일 수다. 
14시 20분에 안부에 내려 하산을 서둘러 14시 56분에 도로에 도착한다. 주차장으로
 올라가는데, 10년 전은 물론, 몇 해 전에 올랐을 때보다는
 완전히 딴 천지의 관광단지를 만들어 놓고 있다. 
 구형왕능도 불확실하여 앞에 傳자를 붙이고 있고, 허준의 선생이라는 
류의태(柳義泰)는 허준보다 100년 후 인물인 유이태(劉爾泰)에 흰트를 얻어 작가가 
만든 가공인물이라는데도 이렇게 허구를 확대 재생산하는 산청군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베트남의 축구 영웅 박항서의 고향이 아 곳이라서 베트남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는데, 가짜임이 밝혀지면 나라망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간단하게 하산주 시간을 갖고 출발해 나들목에 내려 집에 도착했어도 
18시 20분밖에 되지 않았다. 


 *♡♣西施嚬目(서시빈목) ♣♡* 

'서시(西施)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으로,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 또는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의 비유.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西施)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西施)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장자(莊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本質)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실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의 난세(亂世)에 태어난 공자(孔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西施嚬目)'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城狐社鼠(성호사서)♣♡* 
 
성벽에 숨어 사는 묘당(廟堂)에 기어든 쥐새끼라는 뜻으로서 탐욕스럽고 
흉포(凶暴)한 아치를 비유하는 말이다. 직호사서(稷狐社鼠)라고도 한다.
임금 곁에 있는 간신의 무리 즉 성중(城中)에 사는 여우와 묘중(廟中)에 사는 
쥐가 몸을 안전한 곳에 두고 온갖 나쁜 짓을 한다고 하여,
 “임금 옆에서 나쁜 짓을 하는 간신”을 비유 한 말이다.
진서(晉書) ‘사곤전(謝鯤傳)’에 나오는 이야기의 줄거리다.
 동진(東晋) 때 대장군으로 있던 왕돈(王敦)과 대신이었던 조부(祖父)인 왕람(王覽), 
숙부(叔父) 왕상(王祥) 등은 모두 세력가(勢力家)들이었는데, 동진(東晋) 시대
 산동 왕씨(山東王氏)는 모두 유명한 큰 귀족들이었다. 동진왕조가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강남 지방으로 달아나 건강(健康-오늘날의 南京)으로 
천도(遷都)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 왕씨 집안도 함께 남으로 내려와서 여전히
 동진왕조를 좌지우지 하였다.당시 ‘진원제(晉元帝)’ 사마예(司馬睿)의 승상이었던
 왕도(王導)는 바로 왕돈의 사촌형이었고, 왕돈의 아내는 바로 사마염(司馬炎)의
 딸 양성공주였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왕씨와 사마씨가 함께 천하를 휘두르고 있다. 왕여마 공천하(王與馬 共天下)”라고.
그러나 당시 사마씨와 왕씨 사이의 알력 또한 첨예했다. 진원제가 건강(南京)에서 
등극(登極)한 뒤 왕돈은 통수로 임명되어 나중에 강주(康州)와 양주(梁州), 
형주(荊州), 양주(揚州), 광주(廣州) 등 다섯 고을의 군사들을 총지휘하고
 강주자사까지 겸하면서 무창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왕돈은 장강 상류를 장악하고 장강 하류의 도성을 위협하는 형세였다. 
이에 진원제는 유외(劉隈)와 대연(戴淵)을 진북장군으로 임명하여 각각 군사 일만 
명을 이끌고 나가 엄중하게 왕돈(王敦)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자 왕돈은 진원제의 속셈을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군사를 움직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군사를 움직여 도성을 공격하면 완전히 반란이 되기 때문에 경거망동 할 수는 없었다.
이에 왕돈은, “유외가 나라를 망치는 간사한 무리이니, 임금신변에서 빌붙어 사는 
그와 같은 간신 유외, 대연을 제거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왕돈의 수하에서 장사(長史)로 있던 사곤(謝鯤)이 왕돈에게 일처리를 신중하게
 하라고 권고하면서, “유외는 간신이지만 성벽에 숨어사는 여우이며, 묘당에 기어든
 쥐새끼”라고 말하였다. 즉 임금주변에 있는 탐욕스러운 관리들로써 바로 
성호사서(城狐社鼠)라고 말했다.
“여우나 쥐는, 임금 곁에 있는 간신의 무리로서 성중에 사는 여우와 사중(社中)에 사는 
쥐는 몸을 안전한 곳에 두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궁성(宮城)에 숨어있고
 묘당(廟堂)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궁성이나 묘당을 훼손할까 걱정하여
 잡아 없애기 어렵다”고 하였다.
   松亭(정자 솔) 朴載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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