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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제 24차 종주를 하고
송정 박재호
2007년 10월 28일 일요일, 낙동정맥 제 24차 종주일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맞춰놓은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잠이 깬다. 어제 한림산수회의 밀양 백운산
산행거리가 짧았기에 몸피로는 없으나 5시면 나서야 하는 마음 부담 때문에 앞당겨 잠이 깬 것이다.
건강을 위한 산행이기에 먹는 것도 제대로 먹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밥 지어 먹고 도시락
챙기고 행장을 챙기다보면 한 시간 반은 걸려야 하니 잠은 항상 설치는 수밖에 없다.
오늘따라 종합운동장에 행사가 있어 버스를 입구 도로변에 정차를 하고 있어 차 찾느라 늦어지는
통에 6시 8분에 출발을 하여 언양 휴게소에 들렸다가 지난 구간 하산 지점인 부산 지경고개에
도착하니 8시 10분이다.
8시 15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차량 밖으로 나와 곧바로 그곳을 출발 계명봉 쪽으로 향했다.
고개에서 처음 도로를 따라 올라야 되고 조금 오르다가 다시 밭가를 따라 올라야 되는데 처음은
완만한 길이나 정상으로 오를수록 급 비탈이 나오고 돌도 많은 길이다.
코가 땅에 닿도록 심한 된비알을 약 40여분정도(표고 약 450m) 숨 가쁘게 한참동안 치고 오르다
보니 계명봉 정상이 나왔다
9시 계명봉(601.7m)정상에 도착해보니 정상에는 1.7m높이의 작은 돌탑이 있고 여기서 장군봉과 금
정산 등은 날만 밝으면 잘 조망되는 곳이었다. 이 봉우리에서 납자(衲子)들이 수행정진을 했는데
납자들이 새벽 예불을 드릴 때가 되면 하늘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정확하게 그 시간을 알려
주었다고 하며, 그래서 이 봉우리가 '계명봉(鷄鳴峰)'으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계명봉에서 다시 정맥은 우측으로 돌려 고도를 약 200m이상 내려야되는데 처음부터 심한 비탈길이
었다.
정맥은 계명봉에서 내려오면서 기수를 약간 좌측으로 돌리면서 능선을 타야 옳았을 것 같은데 골
짜기로 빠져 도로 올라왔어야 했음이 장군 봉으 중턱에 올라 돌아보고서야 느꼈다. 계명고개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은 지경고개에서 계명봉으로 오르는데 비하면 경사가 완만하여 별로 힘들지
않았다. 우뚝 솟은 금정산을 저 멀리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담고 조금 올라가니 시야가 확 트이고
억새밭이 전개된다.
장군봉(746.6m)은 정상에 오르지 않고 어깨부근에서 좌측으로 돌려 나가도록 되어있었으나 시간도
넉넉하여 정상까지 오르기로 한다.
사진을 찍고 찍어 주고는 바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꺾어 양산 쪽에서 오는 길로 접어들어
금정산으로 향하는데 위치가 낯이 익다. 문득 기억에 떠오른 것은 지난 해 2월 한림 산수회 가 불
과 9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이 길로 올랐는데, 잔설이 남아있어 발이 빠지던 일과, 혼자서 미끄러운
바위 위로 고당봉에 올랐던 생각이 이제야 떠오른 것이다. 장군봉 오르기를 포기하고 곧바로 금정
산으로 오는 후미 그룹과 합류하여 진행하는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좋은 편이다.
길가에 평평한 지점에 이르자 11시도 되지 않았는데 점심을 먹잔다. 애써 먹어보나 입맛이 나지 않
아 밥은 남기고 과일을 먹고 있는데 후미부대가 속속 도착한다. 밥 먹기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 와
본 경험이 있는 터라 적당한 장소로 안내하여 단체사진 찍고는 출발하여 고당봉을 오르는데 전에 올
랐던 길로 오르려니 내려오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둘러 가란다. 이 좋은 날씨에도 위험하다는 길을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을 혼자 올랐음을 생각하니 아찔한 기분이 든다.
둘러갔어도 끝내는 줄에 매달려 바위를 타오르고서야 금정산고당봉 정상에 도착한다. 아직도 시각
은 11시 40분이다. 비좁은 바위 덩어리 정상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기념 촬영하는데도 전쟁 치루는
분위기다.
내려오는데도 오르는 사람 틈에 끼어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어려운 고비는 다 넘겼다
는 생각에서인지 노래들을 부르는 여유도 가진다. 바닥에 내려와 금정산성 북문에 이르니 12시
20분이다.
여기서 잠깐 금정산과 산성의 유래를 안내판에서 옮겨보면 이렇다.
-고당봉(姑堂峰:높이801.5m)-.
『정상(頂上)부분이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는 이 봉우리에는 하늘에서 천신인 고모(姑
母)할머니가 내려와 산신(山神)이 되었다(異說도있음)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는바,이는 고대의 신
선사상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지금도 정상부근에는 고모당(姑母堂)이라는 기도처가 있다.
금정산(金井山)10여봉 중 최고봉이며, 그 가슴께에 용머리형상의 용두암(龍頭岩)이 있고, 남쪽 산허
리쯤에는 고당샘이 있다. 동쪽 능선 허리에는 범천(梵天)의금어(金魚)가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와 살
았다는 금샘(金井)이 있어서 금정산(金井山)과 범어사(梵魚寺)라는 이름의 연원이 되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금샘과 범어사 설화-
『금샘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靈山)임을 일러주는 것과 '금정산'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라는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
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尺)이며 깊이는 7촌(寸)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나는
고기가 살았는데, 그래서 금빛 고기가 사는 우물 곧 '금정(金井)' 이란 산 이름과 고기 곧 '범어(梵
魚)' 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 사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는데 신라 의상대사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해에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대왕이 근심에 쌓여 있는데 꿈
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 '금샘'에 가서 칠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
을 물리칠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대왕이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샘을 찾아 기도를 하니 땅이 크게
진동하며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현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들을 격파했다.
대왕이 크게 기뻐하며 의상스님을 예공대사에 봉하고, 금샘 아래 호국사찰을 세웠으니 곧 '범어사'
이다』
-미륵사(彌勒寺) 전설-
『왜적 5만 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첩자를 뭍으로 올려 보냈다. 미륵암의 원효대
사는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 하여 탑 앞에 나란히 세운 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
기를 꽂았다. 그 장군 기를 보고 2명의 첩자가 미륵 암까지 올라왔다. 대사는 호리병으로 신술을
부려 첩자의 목을 졸랐다. 첩자들이 살려 달라고 하자 호리병 3개를 대장에게 전해주라며 돌려보냈다.
화가 난 왜적대장은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친 순간 그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왜적들이 모두 놀라
그대로 달아났다. 대사가 신라의 장군 기를 꽂았다는 바위에는 지금도 독성각 옆에 움푹 파인 자국
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독성각으로 오르는 좁다란 돌계단 길의 중간 부분에는 석간수가 솟아 나오는 작은 샘이 있다. 그곳
바위 구멍에서 쌀이 나와 스님의 끼니를 잇게 했다고 한다.』
-고모당(姑母堂) 전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밀양(密陽) 사람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신명을 바쳐 사부대중의 칭송이 대단했다. 이 보살은 큰 스님에게 "제가 죽으면 화
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姑母靈神)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당제(姑堂祭)를 지내주
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겠습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큰 스님은
그 유언대로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해마다 정월 보름날과 단오 날 두 차례 제사를 지냈더니 과연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됐다.
한때 젊은 스님들이 당제를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했는데 그 뒤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다시 고모 당을 고쳐지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고모당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일러주는 전설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금정산성(金井山城)-.
『사적 제 21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장전동. 구서동, 북구 금곡동. 화명동. 만덕동 일원이 성은 임
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이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7km, 높이는 1.5∼3m이고, 면적은 약
8.2km에 이르는 국내산성 가운데 가장 거대한 성이다. 처음에 산성을 쌓은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고
대에 남해안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헌종 8년)에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들여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대책을 강의
하는 가운데 금정산성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으나, 1701년(숙종 28)에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건의로 착공하여 이듬해에 성을 준공하였다. 그후 1807년(순조 7)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문
을 준공하였고, 이듬해에는 서. 남. 북문의 문루를 완성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금정산성부설비가
장전동에 전해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까지 동. 서. 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 북문을 복원하였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中軍)과 승병장 등의 직책을 가진 중간간부와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3개 읍 소속의 군인과 사찰의 승려가 차출되어 지켰다. 금
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용이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라고 기재
되어있었다.
-금정산의 지형특성 토르(Tor)
『금정산의 산정(山頂)은 성채(城砦)와 같고, 산릉(山陵)은 성곽처럼 보인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드러나 "토르(Tor)라는 독특한 돌탑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금정산이 그
높이와 견줄 수 없는 고산의 품격과 빼어난 산세를 뽐내게 한다. "토르는 화강암이 기계적 풍화작용
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똑바로 서있는 돌탑" 또는 "바닷가에 떠있는 섬"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15m에 이르는 큰 "토르"는 고당봉과 상계봉 두 개 뿐이나, 그 밖의 능선에는 규모는 작지만
50여 개가 마치 병풍처럼 무리지어 있다. 금정산 "토르"의 대부분은 화강암의 모서리가 둥글게 달아
있고 관이나 기둥모양으로 쪼개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땅속 깊은 곳에서 지하수 작용으로 조각되
어 단층운동으로 지상에 융기한 뒤 다시 오랜 기간의 풍화작용으로 독특한 모습으로 다듬어 지게
되었다.
이어서 성곽을 따라 진행하는데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 일행 찾기도 쉽지를 않다. 원효봉,
의상 봉을 지나 동문에 이르니 정용도 등반 대장이 동동주 파티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 원래 예정
은 북문 주위를 계획 했으나 중간에 있었던 간이주점들이 없어져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성안 집’이란 현수막이 걸린 집에 들어서니 오리고기 굽는 연기와 냄새가 가득했으나 눈요기만
하고 도토리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는데 시원한 맛에 그런대로 먹을 만 하다.
앞서 다녀간 사람의 산행기대로 라면 아직 한 시간 반을 걸어야겠기에 출발을 서두르니 오후 1시
50분이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평지라 걸음 실력을 발휘한다. 언젠가 서울 천계 천 복원 현장을 관
람 했을 때 정체되는 버스 보다 먼저 걸어 도착했던 속도로…….
금정산 대륙 봉을 지나고 남문을 통과하여 속도를 내었는데 오후 2시 47분에 만덕 고개 도로에
내려선다.
그러나 좁은 도로에 차들을 주차시켜 놓아 승용차도 드나들기 어려운 실정이니 버스가 진입할 수가
없는 터, 그래서 한참을 우왕좌왕하다가 터널 입구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 헤맨 끝에 겨
우 차에 오를 수 있었으나 일부 회원들은 터널 반대편으로 하산하여 택시를 타고 오는 진풍경도 연
출 하였다. 제 2의 도시 부산의 공휴일 공원이었기에 통제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
도 휴대폰이란 문명의 이기 덕택으로 연락이 닿아 한자리에 모여 하산 주 잔치는 제대로 벌릴 수
있었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출발한 버스가 6시 15분 언양 휴게소를 거쳐 7시 경에 포항에 도착 했는
데, 마지막 버스에 남은 손동학 총괄 등반대장과 최종헌 교수 정왕락 후배 등이 보따리를 들고 내리
며 끌어내리는 정을 거절할 수 없어 술자리를 가지다 보니 밤늦게 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틀 거듭 산행을 한 터라 몸의 피로도 피로지만 밀린 일들이 많기에 내일 걱정이 앞서기는 하나
이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후배들의 끈끈한 정이 더 맛 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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