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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인은 천손족

정자 솔 2008. 8. 1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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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로 알자!


                                         한국기행문학연구소  최 강 현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자기네 조상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  “개[犬․狗] 족보(族譜)는 있어도  사람의 족보는 없다.”는 속담의 주인공

들인 서양 사람들은 남의 자식을 입양할 때에 철저하게 그 입양(入養)될 어린이의

인적 사항을 반드시 명확히 하여 뒤에 그 아이가 성장한 뒤에 자기 근본을 알고

싶어 하면 알아낼 수 있도록 교육시켜서 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自己正體性)

을 일깨워 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지난날 가정 중심의 가족(家族) 사회 때에는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겨 잘 모신

것이 자기네 족보 책이었다.   족보란 원래  대가족 중심 사회에서  가문(家門)과

가문 사이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핏줄로 이어진 자기 집단의  소목(昭穆)에

따른 위계질서를 나타낸 인명사전(人名事典)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체험으로는 이 족보를 모시는데 철저하시었던 분은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도  남의 집에서 시집오신  나의 할머니요,  어머니이시었다.

 

   왜제(倭帝)시대에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 극에 달하여  전쟁물자가

부족하여 패망 일보 전에 다다른 왜놈들은 당시 초등학교  2학년 이상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미루나무(포풀러나무)꽃 솜털(낙하산 제조 원료) 수집과  소나무 광솔

(자동차 연료용)따기 따위의  중노동을 강요하며  단말마처럼  안간힘을  쓰며

버티었다.   왜놈들은 급기야  병기(兵器)를 만들  자료로  학교 종과  각 민가의

밥그릇과 숟가락 젓가락 같은  놋쇠 제품을 공출(供出)  받다가 소기의  목적에

미달한다고 각 가정을 불법 침입하여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지어 놋쇠  요강까지

앗아가면서 못된 짓을 하였다.  그러한 왜놈들은  그 먼저 단제 기원 4269(1936)

년부터 우리의 성과 이름을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려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여야 한다면서 가진 압박을 다하여  우리 천손족(天孫族)을 저희 “쪽발이”화하려

할 때에 나의 할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불학무식(不學無識)한 한 사람의  농부에

지나지 아니하였지만, 상당히 오래 약 3년간 저항을 하시었단다. 어느 날 2km 밖의

주재소(駐在所:지금의 경찰서의 파출소)에서 순사(巡査:지금의 순경)들이 마을에

몰려와 창씨개명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집을 수색하여 족보를 걷어갔단다. 이때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외출 중이라 집안에서 그 불한당 놈들을 상대할 사람은

오직 당시 40대 후반의 나의 할머니뿐이었단다. 가난한 초가집 안방에 두 가닥

나무를 벽과 벽 사이에 걸쳐놓아 만든 시렁 위에 모셔 놓은 2권 1질의 우리 최씨

(崔氏) 족보를 왜경(倭警)이 가져가려 하자 창녕조씨(昌寧曺씨인 나의

할머니께서는 한사코 저항하시면서 “이 놈들아!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 그 책은

우리 조상님들이 모셔진 책이다!” “이 짐승 같은 놈들아!” 하시며 저항하시다가

등줄기를 그 놈들의 발길에 차이어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시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려 할 때마다  마치 기상예보나 하시듯 나이 어린 나에게 주물러달라

시면서 당시의 무용담을 들려주시곤 하였다.

필자는 유독 우리나라만이 “조국(祖國)=모국(母國)”으로 통하는 것은 글자그대로

할아버지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가 같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국 여성들이 우리나라로 귀화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제는 우리나라도 단일민족 운운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허지만, 한국으로

귀화한 여성이라면, 당연히 옛날의 시할머니를 배우면, 다문화 가정이나 다문화

가족의 일원은 물론 당당한 한국인의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각 가문(家門)의 제1 보물(寶物)로 존경받던 족보들이 이제는 집집이

둘 곳 없어 주체스러운 골칫거리로 전락되어 헌 책방이라면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폐지에 지나지 아니하는 쓰레기가 되었다. 이 모두가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이

잘못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필자는 감히 선언한다.

 

   오늘날의 우리 교육은 주로 서양에 가서 개인 중심의 개인 능력 개발을 빙자한

모래알 사회를 지향하는 새 교육이라는 이름의 교육학을 공부한 신교육의 대가들이

한국 교육을 주무르면서 “문교부(文敎部)”를 깨부수고, “교육 인력 자원부

(敎育人力資源部)”→“교육 과학 기술부(敎育科學技術部)”로 이름을 바꾸어 사람

교육이 아닌 물질 교육 중심으로 바꾼 데서 필자는 그 원인을 찾는다. 사람 교육과

가정 중심의 집단 사회 교육을 저버리고, 모래알 사회의 개인 중심 교육을 하다

보니, 공교육장인 오늘의 우리네 학교에는 제자와 스승은 없고, 교육자라는 이름의

월급쟁이 노동자와 수업료를 내고 개인 능력이나 경쟁의 기술을 익히는 학생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학교에는 교원노동조합원과 문명사회에 각각 흩어져 한 개

부속품으로 쓰일 인면수심(人面獸心) 동물만 세계 제일의 교육비를 쏟아 부어 대량

생산을 하고 있다. 희망과 목표가 있는 그런 생산재(生産材)가 아닌 절망과 진로가

망막한 폐품형 생산재들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학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공장도

아니다. 지금 “학교는 파리 날리고, 각종 입시학원은 대박을 친다.”는 속담이

진실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부모들이 좀 더 냉정하여져서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인구 억제 정책 때의 표어대로 실천하여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나의 가장 귀한 내 자식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 로켓을 만들어 달나라로 이민 가서 영영 못 볼 자식으로 키울 것인가?

깊이 그리고 차분히 생각하여 현명한 선택을 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류(主流)를 이루는 동경어(憧憬語)는 “대박․사랑․행복”

세 가지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필자는 이런 글을  쓰지도 아니한다.  문제는  모래알

사회에서 오직 “나 하나”만의 “대박”이고, “사랑”이고,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家庭)도 없고, 가족(家族)도 없다. 가정이 없으니, 미더운 부부(夫婦)

도 없고, 가족이 없으니, 부모(父母)도 없고, 형제도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세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우리 사회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개(犬․狗)마도 못한 도깨비들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아울러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도 이 지구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될 것이 어두운 밤에 불을 보는

듯 환하다.

 

   이에 필자는 60억 인구의 지구촌 시대 200여 나라들의 아파트촌에서 내가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과 귀여운 나의 자손들이 남의 아파트에 들어가서 서러움과

눈치 보며 살지 아니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잘 살 수 있는 민족적 주체 의식을

드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혹 못 입고,  덜 먹드라도

행복지수(幸福指數)가 높아 국민 개개인이 모두가 “나는 행복한 대한민국

국민이다!”를 외치며 뽐낼 수 있어서 세계의 타국 사람들까지도 한국인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다운 사람들의 사회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개국 할아버지이신 단제(檀帝)님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

실천의 핵심(核心)이 될 수 있는 희망과 용기와 목표를 심어 주고자 이 글을 초한다.

 


            2. 한국인의 뿌리

 

   옛날 환한 나라[환국(桓國)․한국(韓國)]와 밝다나라[단국(檀國)․배달국(倍達國)

백두국(白頭國)]의 역사는 비록 선사시대이기는 하지만, 구석기 시대 초기인 약

1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원모인(元謀人)과 북경인(北京人)이라는

유골(遺骨) 화석의 주인들로부터는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였다. 저 싼시성

시안 반파(陝西省西安半坡)에서 발굴된 남전인(藍田人)은 약 80만 년 전에

살았으며, 북경인은 단제 기원 4251(1918)년에 주구점(周口店)의 용골산(龍骨山)

동굴에서 출토되었지만,  약 70만 년 전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으로 알려져 왔다.1) 

  필자는 여기서 이들을 막연한 인류로서의 “우리”가 아닌 지금의 중국 대륙 안에서

살았던 “이족(夷族=天孫族)”들의 조상(祖上)으로 보고 논의한다.

 

   이에 관하여 이제까지 사대주의 사관(事大主義史觀)이나 식민주의 사관(植民主義

史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미친 소리라고 욕하며 귀 기울이려 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우리나라의 역사는 “환한 나라” 또는 “밝다나라[檀國 白頭國․倍達國․桓國]”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 옛 문헌들에서는 “옛 조선[古朝鮮]근역(槿域)․단국(檀國)동국(東國)  청구(靑丘)   환국(桓國)”이라고 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동이(東夷)”

또는 “이(夷)”라고 하였다. 특히 “동이(東夷)”는 중국인들이 저희들의 감정과

지역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감정이 좋을 때에는 좋은 말로 표현하고, 감정이 나쁠

때에는 흉한 말로 표현하여 “견이(畎夷)”, “내이(萊夷)”, “방이(方夷)”, “백이(白夷)”, “빙이(氷夷)”, “양이(陽夷)”, “우이(于夷)”, “융이(戎夷)”, “적이(赤夷)”, “풍이(風夷)”, “현이(玄夷)”, “황이(黃夷)”등 구이(九夷)2) 또는 12이(夷)로 표현하여 왔다.3)

“동이(東夷)”는 지금의 곤륜산(崑崙山) 동쪽 땅에 살았던 “이족(夷族)”을 가리키었다. 이들은 큰 활을 쓰는 교양인(敎養人)․군자(君子) 지도자(指導者) 지성인(知性人)

들이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지금의 중국 대륙에 있었던 옛날의 하(夏)․은(殷)․주(周)는

우리 선조들의 나라이었다는 사실을 이르는 것이다.4)그것은 그곳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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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급 중학교 교과서 중국고대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8.1)

2)林惠祥,『中國民族史』,(臺灣商務印書館, 1936) 쪽 73-93.

3) 안호상,『배달․동이겨레의 한 옛 역사』,배달(檀)문화연구원, 4305(1972).

   張傳璽․楊濟安,『中國古代史敎學參考地圖集』,北京大學出版社, 1984.

4) 崔武藏,「石器의 比較(中國과의 比較)」, 『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李亨求,「靑銅器文化의 比較(中國과의 比較)」,『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李炯佑,「한반도 구석기 문화의 일고찰:중국과의 관계속에서」,『亞細亞古文化』,學硏文化社,1995.

   장동균,『神市本土記』, 아사달, 2002..

   姜亮夫,『古史學論文集』, 上海古籍出版社, 1996.

   徐中舒,『先秦史論稿』, 巴蜀書社, 1992.

   宋新潮,『殷商文化區域硏究』,陝西人民出版社, 1991.

  

땅속의 유물들이 우리나라 옛 문화재(文化財)들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을 증거로

삼을 수 있다. 이제까지는 이 사실을 사대 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과 식민사관

(植民史觀)에 의하여 우리 학생들에게 “우리의 문화재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고 가르치며 중국 문화의 노예로 교육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그 고장에 먼저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우리의 선조 환한 겨레 밝다겨레

[桓族․檀族․天孫族]가 뒤에 들어온 한족(漢族)들에 의하여 밀리고 쫓겨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오자, 나중에 온 그들이 그곳을 계속 지배하며 살다 보니,

그곳이 바로 그들의 땅이 되고, 그 땅에 묻힌 사람들도 그들의 조상이 되고,

그 땅에서 출토된 문화재들도 그들의 조상(祖上)이 사용한 문화재로 평가되어

현재 중국의 동북 삼성(三省)인 옛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모두 중국의 역사요,

문물(文物)이 되는 것과 같다.

 

   중국인들이 우리 조상을 “이(夷)”라고 불렀는데, 그 글자의 뜻을 동한인(東漢人)

허신(許愼)이 단제 기원 2433(서기 100)년에 지은『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찾아보면, “이(夷)”는 “동방(東方)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대(大)”와 “궁(弓)”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관하여 후대 중국인 단옥재(段玉裁)는 그의 주(注)에서,


     (전략)남방의 만(蠻)․ 민(閩)은 벌레 충(虫)자에서 비롯되었으며, 북방의

적(狄)은       개견(犬)자에서 온 것이고, 동방의 맥(貉)은 돼지 시(豕)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서방의 강      (羌)은 염소 양(羊)자에서 비롯되었는데,(중략)

오직 동이만은 큰 대(大)자에서 비롯되       었으니, 대인(大人)이다. 이속(夷俗)은

인(仁)하고, 인(仁)한 이는 오래 사[壽]노니, 군자      (君子)가 있어 죽지 아니하는

나라이다. 살피건대,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사람도 또       한 크니, 대(大)자는

사람의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이(夷)자의 전자(篆字)는 대(大)자   에서 비롯

되었으므로, 하(夏)자와 같다. 하(夏)는 중원 사람이다. 활[弓]에서 비롯되었다   는

것은 숙신씨(肅愼氏)가 호시(楛矢)와 석노(石砮)와 같은 유를 공물로 바치었기

때문  이다.”5)라고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 중국의 역대 역사서적에서 우리 조상을

“이(夷)”라고 한 연유와 함께 하(夏)가 슬며시 중국인으로 둔갑된 사연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단옥재가 “하(夏)는 중원 사람이다.”라고 한 것에서의 “중원”은 지금의

중원이 아닌 고대 우리 조상들이 살던 곳을 가리키니, 앞으로 우리는 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둘째,  중국의 근대 사학자 양계초(梁啓超)는 그의 『중국역사연구법 부보편(中國歷史硏究法附補編)』에서 “중화민족은 중국의 원주민이 아니고 도리어 이주민이다[中華民族是否中國之原住民抑移住民]”라고 하였으며,6) 임혜상(林惠祥)은 “한족(漢族)의 고유한 성분은 화(華) 혹은 하(夏)라고 하며, 또 제화(諸華) 제하(諸夏)라고도 일컬으며, 혹은 모아 일컬어서 화하(華夏)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화하(華夏)계로 부른다. 화하라는 이름은 상고(上古)에서 일어났다.”7)고 하였으나, 이것은 “화하(華夏)”의

어원을 무시하고 잘못한 말이다. 일본인 제교철차(諸橋轍次)의 『대한화사전

(大漢和辭典)』에 따르면, “화(華)”는 “꽃”이라는 뜻 이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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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衛聚賢,『古史硏究』,上海文藝出版社, 1990.
5) 段玉裁,『說文解字注』, 藝文印書館, 1967.

6) 梁啓超,『中國歷史硏究法』,(臺灣中華書局, 1974) 쪽 5.

7)“(전략)漢族之固有的成分爲華或夏又稱諸華諸夏或合稱華夏本書卽名之爲華夏系華夏之名起於上古(하       략)”[林惠祥,『中國民族史』上,(臺灣商務印書館,1979) 쪽 45.]

 

지명(地名), 산명(山名), 성씨(姓氏)등의 뜻이 있음을 밝히면서 “황색(黃色)”, “광택(光澤)”, “흼[白]”, “곱고

아름다움[鮮美]”, “예의와 문화가 성한 곳[禮文盛地]”, “중국인이 제 나라를

이르는 말[中華]”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화(華)”자에

“황색(黃色)”, “광택(光澤)”, “흼[白]”, “곱고 아름다움[鮮美]”, “예의와 문화가

성한 곳[禮文盛地]”이라는 뜻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로 천손족(天孫族)으로

“밝음”과 “환함”과 “빛남”과 “예의를 숭상함”의 우리 조상들에 관한 저네들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화하(華夏)”는 곧 우리 조상들의 나라 이름이면서 동시에 우리 조상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중국 대륙에 밀려온 한족(漢族)들에 의하여 우리 조상들이 대륙에서

쫓겨나면서 살아남기에 바쁘다보니, 이념과 자존심과 정체성(正體性) 유지와

회복에 마음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 곧 오늘의 우리들로 하여금 지리멸렬(支離滅裂)

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셋째, 지금의 중국 산뚱성 쟈상현(山東省嘉祥縣)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에는

우리의 시조 할아버지이신 단제(檀帝)의 사화(史話)를 조각한 그림돌[畵像石]의

그림이 이미 단제 기원 2100년경에 영광전(靈光殿)이라는 신전(神殿)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러한 문화 유적이 같은 산뚱성 지난현(沂南縣)의 베이차이촌

(北砦村)과 야오닝성 베이위안가(遼寧省北轅街)에도 있다는 사실에서 이 지역에

살던 옛 사람들은 바로 우리의 조상인 이족(夷族)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8)

   넷째, 중국인 역사학자인 쟝리앙푸(姜亮夫)가 그의 글에서,


      (전략) 우이(嵎夷․禺銕․郁夷)는 청주(靑州)의 동쪽 땅을 가리키니, 곧 “공자가

살고       싶다.”고 한 곳이 산 동쪽에 있는 동이(東夷)이다.(중략) 내이(萊夷)․회이

(淮夷)․서이       (徐夷)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우이라고 하는 곳은 『소신미은

(小臣謎殷)』에서 말하는       해미(海眉)와 같은 곳이다. (중략) 『후한서․동이전

(後漢書․東夷傳)』에서는 또 이르       기를, “옛날 요(堯)가 희중(羲仲)에게 우이

(嵎夷)의 일양곡(日暘谷)에서 살 것을 명하였       다.”고 하였는데, 대개 해가

솟아오르는 곳을 이르는 것이니, 곧 우이는 조선(朝鮮)땅이       된다. 대개 조선

땅은 산동반도(山東半島)와 요동반도(遼東半島)가 고대에는 같은 바닷     가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우이라고 일컬은 것이다.(하략)9) 


라고 한 것에서 우이(嵎夷․禺銕․郁夷)․내이(萊夷)․회이(淮夷)․서이(徐夷)․해미

(海眉)․일양곡(日暘谷=湯谷)이 모두 우리의 옛 조선(朝鮮)땅의 일부들을 달리 부른

이름들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에 관한 또 다른 증거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더욱 뚜렷하여진다.

 

  다섯째, 산동성 임치시(臨淄市)의 제문화연구소(齊文化硏究所)에서 4337(2004)

년에 편 『주진제도(走進齊都)』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전략) 임치야말로 동이족이 먼저 백성들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찬란한 문명을

창조       한 중심구역이며, 근원인 곳이다. 복희(伏羲)가 줄을 매어 그물을 짜서

물고기와 짐승       을 잡는데 사용하여 어수렵(魚狩獵)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신농(神農)은 나무를        깎아 쟁기와 보습을 만들어 좋은 밭을 일구는데 써서

농업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났다.       신농은 한낮에 저자를 세워 사방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천하의 물건들을 걷어 다른 지  역에 가서 각자가 구하는 것을 교역하여

돌아오게 하니, 장사와 무역이 이에서 일어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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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최규성,『이야기로 배우는 한국의 역사』, 고려원 미디어, 1993.

9) 姜亮夫,『古史學論文集』(上海古籍出版社, 1996) 쪽 25-26.


물질생활을 끊임없이 개선하여

선민들을 상대로 정신문화적 욕구를 이끌어 발전시       켰다. 복희는 팔괘와

글자를 만들고, 아울러 앞일을 예측하는 기술을 행하였고, 신농은       풍년을 노래하며 악기를 만들었으며, 치료와 제약 등의 기원을 열었다. 후직(后稷)은        집과 옷을 만들어 처음으로 몸을 가리게 하였으며, 치우(蚩尤)는 쇠붙이를 만들었고,        이예(夷羿)는 화살을 만들었으며, 배와 수레를 부리었고, 순(舜)은 <소악(韶樂)>을 만       들었다. 이처럼 임치는 고대 동방문화와 화하(華夏)문화의 발생과 발전과 개창성에 공       헌한 곳이다.(하략)10)


라고 하여 복희․신농․후직․치우․이예․순임금들을 모두 동이족으로 인정하고, 또 그들에 의하여 이른바 “화하문화(華夏文化)”가 바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여섯째, 현재 중국인들이 저희 선조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은(殷)나라가 우리의 선조가 세운 나라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은나라 건국 시조 설(契)의 출생담이 난생설화로 부여계(扶餘系)임이 그 증거이다. 최근에는 갑골문(甲骨文) 연구자인 맹세개(孟世凱)가 그의 저서『하상 사화(夏商史話)』에서 “제비[玄鳥]와 상(商)나라의 고사”를 설명하며 상나라의 시조 설(契)은 황하(黃河)의 하류에서 살았던 대단히 큰 이인부락(夷人部落)의 한 큰 씨족(氏族)의 한 여자인 간적(簡狄)이 물가에서 제비 알을 먹고 낳은 아들이고, 진시황(秦始皇)도 동이족(東夷族)의 가지[分枝]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도 아득한 옛날에는 지금의 중국 땅에 살았던 원 토박이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조상들인 이족(夷族=천손족)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11)

 

  일곱째, 쓰촨대학(四川大學)에서 50여 년간 봉직하고, 지금은 작고한 중국의 고대 사학자인 쉬중슈(徐中舒)는 그의 『선진사학논고(先秦史學論稿)』에서 지금의 중국인들이 자기네 민족의 시조(始祖)라고 하는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아들로 이름은 효(孝)이고 호를 김천씨(金天氏)라고 하는 소호(少昊: 少皞)를 『좌전(左傳)․소공(昭公) 29년(年)』조를 인용하여 “전설 속 동방의 소호는 곡부(曲阜)에 수도를 정하였다.[傳說中東方的少皞是建都在曲阜的]”고 하면서 “이(夷)와 용산문화(龍山文化)의 관계[夷與龍山文化的關係]”를 설명하고, 용산문화 유적을 이족(夷族)의 문화로 인정하고, 또  은(殷)나라 시조 설(契)의 출생 전설인 간적(簡狄)이


제비알[玄鳥卵]을 주워 먹고 출산한 이야기가 동방민족(東方民族) 공통의 보기임을 증명하고, 이어서『예기․잡기하(禮記․雜記 下)』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련과 대련은 거상을 잘하여 3일 동안 잠을 자지 아니하고,      3 개월간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1년 동안 슬퍼하였고, 3년을 근심으로 지냈으니, 동      이의 자손들이었다.[孔子曰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懮, 東夷之      子也]


라는 기록을 인용 소개하고, 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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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략) 臨淄正是東夷族先民率先開化創造燦爛文明的中心區域和源頭所在伏羲結繩爲网罟用來捕魚狩獵漁狩業由此興起神農斫木爲耒耜用來開墾良田農業由此興起有神農日中立市招致四方之民聚集天下之貨使他們交易而歸各足所求商業貿易由此興起物質生活的不斷改善引發了先民對精神文化的需求伏羲畫八卦刻文字竝行推演豫測之術神農歌豊年制琴瑟更開醫藥本草等源后稷開居制衣弊體之始蚩尤造冶夷羿制箭修興舟車舜作<韶樂>等都對古代東方文化和華夏文化的發生與發展有開創性貢獻(하략)(解維俊,『走進齊都』, 百花文藝出版社, 2004

11) 孟世凱,『夏商史話』,(中國國際廣播出版社,2007). 쪽 72-74.

 

       논어․자한(論語․子罕)』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      [子欲居九夷]”하셨으니, 주(周)나라 사람들이 동방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싸잡아 은      (殷)나라 사람들은 이인(夷人)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에서도 설명하기를, 조선은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짓기와 누에치기와 베짜      기의 가르침[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을 받아들인 영향으로 “그 백성들은 마침내 도둑질      을 하지 아니하니, 집집마다 모두가 문을 열어놓고 살았으며, 부인들은 정조와 신의가       있어 음탕한 짓을 하지 아니하였다.[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이것은      바로 유가(儒家)의 이상적(理想的)인 삶이었다.12)


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지금의 산뚱성(山東省)의 흑도문화(黑陶文化)가 바로 우리 조상들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여덟째, 최근에 발표된 단국대학교 생물학과 인류유전학 전공 교수인 김욱 박사가 시행한 한국인 유전자형의 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인 95%를 차지하는 한족(漢族)과 일본 본토인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하였다. 특히 김박사는 “우리 조상의 주류가 몽골에서 유래한 기마민족이 아니라 중국 황허(黃河)와 양쯔강(揚子江) 일대를 지배하던 농경민족이었음을 알려준다.”고 주장한 데에서도 지금의 중국대륙을 지배하였던 옛날 옛적의 원토박이들은 곧 우리 조상들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가 있다.13)

   아홉째, 오늘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발해국의 문화재들이 모두 중국 유물로 둔갑하고 있는 점에서 근래에 발굴된 앙소문화(仰韶文化)․용산문화(龍産文化) 유적들이 지난날 우리 조상들의 생활 유적임이 반사적으로 증명된다. 이에 관하여는 


   지금의 중국인들은 심지어 현재 북한(北韓)의 수도(首都)인 평양(平壤)까지도 지난날 고구려의 수도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중국 땅으로 만들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속수무책으로 남북한(南北韓)이 대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통합(統合)되지 못하고 이대로 500년만 지나간다면, 그 때에는 분명히 우리 후손들이 모두 중국 기록에 따라서 고구려(高句麗)나 발해국(渤海國)도 중국 역사 속의 나라들이라고 하며, 지금의 북한(北韓)까지도 우리와 다른 종족이 세운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라고 하여 완전히 다른 민족의 나라로 인정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열째, 한족(漢族)들은 평상생활(平床生活)을 하는데 반하여 우리 천손족(天孫族)들은 구들[溫突]생활을 한다는 점에서도 지금 중국의 옛 주인이 바로 우리 천손족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에 관하여는


      (전략) 백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인(北京人)의 인골화석(人骨化石)과 불에 탄       짐승의 뼈, 그리고 중국의 주구점(周口店), 황하 유역(黃河流域)의 동이족(東夷族) 분포       지역에서 1926년 발굴된 것이 있다. 이 유적의 바닥에는 개울돌[하원석(河原石)]을 깔       아 놓았고 화로를 사용하였으므로 이때 이미 불을 사용했고 구들 또는 온석(溫石)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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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徐中舒,『先秦史論稿』,(巴蜀書社, 1992) 쪽 35-41.

13) 김훈기,「한국인 조상은 농경민족」,『동아일보』 제25758호,

14) 김준봉,리신호,『자랑스런 우리의 문화유산 온돌 그 찬란한 구들문화』,(청흥, 200) 쪽 67-68.


고 한 기록과 함께 당(唐)나라의 문신이며 대 문장가이던 한유(韓愈)도 그의 「쟁신론(爭臣論)」에서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뜻할 겨를이 없고, 묵자의 집 굴뚝에는 검정이 묻지 아니하였다.[孔席不暇暖墨突不得黔]”고 하였다. 여기서 공자의 자리가 따뜻할 겨를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는 것이고, 묵자의 집 굴뚝에는 검정이 묻을 만큼 불을 때지 못하여 그가 가난하였음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 풀이하여야 할 것은 묵자가 구들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묵자나 공자가 살던 시대의 생활이 우리 천손족 특유의 전통인 구들생활문화를 유지하였음을 증언한 것으로 보면, 지금 중국인들이 자기네 역사요 문화요 철학이라는 선진시대(先秦時代)의 모든 문화는 우리 조상님들의 창조물이며 그들의 자취임이 확인된다.

   열한째,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은 미르[龍]신앙과 봉황새 숭배의 속신(俗信)을 굳게 간직하여 오고 있다. 임금님이 입는 옷을 “곤룡포(袞龍袍)”라고 한다든가, 지금의 우리나라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이 봉황새[鳳凰鳥]인 점을 생각하면서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삼족오(三足烏)를 비롯한 현무(玄武)와 주작(朱雀)의 그림을 상고한다면15), 지금의 중국인들이 용봉(龍鳳)이 저희들 고유의 숭배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의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저희들 선조의 비석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억지임을 알 수가 있다.16)

   열두째, 현재 중국인들이 저희 선조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은(殷)나라가 우리의 선조가 세운 나라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은나라 건국 시조(始祖) 설(契)의 출생담이 난생설화로 부여계(扶餘系)임이 그 증거이다. 최근에는 갑골문(甲骨文) 연구자인 멍시카이(孟世凱)는 그의 저서『하상 사화(夏商史話)』에서 “제비[玄鳥]와 상(商)나라의 고사”를 설명하며 상나라의 시조 설(契)은 황하(黃河)의 하류에서 살았던 대단히 큰 이인부락(夷人部落)의 한 큰 씨족(氏族)의 한 여자인 간적(簡狄)이 물가에서 제비 알을 먹고 낳은 아들이고, 진시황(秦始皇)도 동이족(東夷族)의 가지[分枝]라고 하고 있는 것에서도 아득한 옛날에는 지금의 중국 땅에 살았던 원 토박이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조상들인 이족(夷族=천손족)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17)

   열셋째, 유학(儒學)의 아성(亞聖)으로 숭앙받는 맹자(孟子)가 그의 저술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하(下)에서,

  

       (전략) 순(舜) 임금은 저풍(諸馮)에서 나서 부하(負夏)로 옮겼다가 명조(鳴條)에서 돌      아가셨으니, 동이인(東夷人)이시다. 문왕(文王)은 기주(岐周)에서 나서 필영(畢郢)에서       돌아가셨으니, 서이인(西夷人)이시다.18)


라 하였다. 삼대지치(三代之治)의 성군(聖君)인 요․순․우(堯舜禹) 세 임금님은 물론하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까지 모두가 이족(夷族)의 사람들임이 확실하다. 서이(西夷)는 지금의 서역(西域)이 아니라, 곤륜산(崑崙山)의 서쪽을 가리키는 것이다.

   열넷째, 중국의 역사학자 쉬량지(徐亮之)는 그의 저술 『중국사전 사화(中國史前史話)』


15) 전호태,『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 출판부, 2004.
16) 王維堤,『龍鳳文化』, 上海古籍出版社, 2000.

17) 孟世凱,『夏商史話』,(中國國際廣播出版社,2007). 쪽 72-74.
18)“孟子曰舜生於諸馮遷於負夏卒於鳴條東夷之人也文王生於岐周卒於畢郢西夷之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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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중국의 역법(曆法)은 동이(東夷)에서 비롯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       이다. 그의 선계는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일은       사실 의심할 것이 없다.19)

       

라고 하였다. 이것은 비록 중국인 학자이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적 양심에 의한 진실을 밝힌 것이라고 볼 때에 하(夏)․은(殷)․주(周)가 모두 우리 조상들의 나라이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가 있다. 여기서 책력을 만든 사람이라는 “희화자(羲和子)”는 역시 중국인 역사학자 쟝리앙푸(姜亮夫)가 그의『고사학논문집(古史學論文集)』에서 “희중․희숙(羲仲․羲叔)과 ”화중․화숙(和仲․和叔)”의 네 사람을 묶어서 이른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1년 4계절의 담당자로 풀이하며, 이들을 우이(嵎夷) 사람이라고 풀이하였다.20)

   열다섯째,  또 중국 쪽 역사 기록물들에 나타난 “환한 겨레[환족(桓族)] 곧 밝다겨레[단족(檀․端․丹族)․배달족(倍達族)]”의 다른 이름인 “이족(夷族) 또는 동이족(東夷族)”에 관하여 그들은 그 이름을 시대에 따라 악의적으로 각각 서로 달리 고쳐 일컬었기 때문에 뒷사람들이 볼 때에는 하나의 겨레 부치가 수 십 겨레로 갈라져서 서로 다른 겨레 부치인 것으로 오해하게 하였다. 그 보기는 너무도 많다. 그 보기를 하나만 들어 보이면,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일컬어진 “발해국(渤海國)”의 국민을 “속말갈(粟靺鞨)”이라고 부르는 중국 측 문헌에 따르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식신(息慎)”이라 표현하고, 『진서(晉書)』에서는 “숙신씨(肅愼氏)”라 하고,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읍루(挹婁)”라 하고, 『위략(魏略)』에서는 “(전략) 혹 부여(夫餘)라고 하는 나라는 동쪽으로 읍루(挹婁)와 닿아 있으니, 곧 숙신국이라는 것이다.[(전략) 或謂夫餘東接挹婁卽肅愼國者也]”21)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재의 만주 지역에 있었던 여러 이민족으로 일컬어지는 많은 부족들은 사실 모두가 우리들의 선조이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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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中國曆法始於東夷造曆者羲和子也系出殷商東夷先公也東夷造曆之事實無疑問矣.”(임승국 역주 한단      고기』, 쪽 72에서 재인용함)

20) 『고사학논문집(古史學論文集)』(上海古籍出版社, 1996) 쪽 25.

21) 楊保隆,『肅愼挹婁合考』,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9.

22) 강수원,『우리의 뿌리와 얼』,온누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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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여섯째, 중국의 역사학자이면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의 신봉자인  빠이쇼우이(白壽彛)는 그의 『중국통사강요(中國通史綱要)』에서,


       (전략) 전설 중에서 칭송되는 수령은 요(堯)와 순(舜)인데, 모두 황제(黃帝)의 뒤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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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진 이야기들이다.(중략) 이들은 동방의 한 부락에 살았는데, 전설 중에서      는 이(夷)라고 한다.(중략) 이인(夷人)들은 활과 화살을 잘 만들기로 이름이 나 있다. 이      (夷)라는 글자의 쓰기가 한 개의 활을 등에 지고 있는 사람을 나타낸다. 태호(太昊), 소      호(少昊)와 치우(蚩尤)가 이인(夷人)들 중에서 이름 난 수령(首領)들이다.(하략)23)


라고 하여 요(堯)․순(舜)․태호(太昊)․소호(少昊)․치우(蚩尤)천황들을 모두 이족(夷族)의 수령(首領)이라고 밝히고 있다.

  열일곱째, 우리나라 진주강씨(晉州姜氏)들은 그들의 시조 할아버지를 황제(黃帝) 이전의 옛 임금으로 일컬어지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라고 주장하는가 하면24),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태원 선우씨(太原鮮于氏)들은 그들의 시조를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라고 하며, 행주기씨(幸州奇氏)들은 그들의 시조를 은(殷)나라 시조인 설(契)에서 찾고 있다.25)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에 우리 민족의 정통성(正統性)을 새로 바르게 확인하고, 앞으로 그 전통성(傳統性)을 살려서 이 지구촌(地球村)에서 영원히 ”환(桓]한 하느님 후손 겨레인 밝다나라[檀國․倍達國]의 천손족(天孫族)”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세계의 지도국민(指導國民)으로 살 수 있는 뿌리 정신의 확립을 대한민국의 각 급 학교 교육의 지표(指標)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한족(漢族:긴 소리로 발음함)들은 원 토박이[原住民]가 아니고 뒤에 다른 곳에서 옮아온 인도유럽[Indo-European]계 사람들이다.25)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는 저들이 서로 다른 종족처럼 이름을 바꾸어 갈라놓은 우리 조상들을 가능하면, 통합하여 동이족(東夷族)을 중심한 이족(夷族) 곧 천손족(天孫族)으로 보아 잃어버린 우리 문화와 역사와 문학을 되찾도록 하여야 한다.

   조선 말엽의 떠돌이 시인 김삿갓[金笠=金炳淵]공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어리석은 일을 더 이상은 되풀이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김삿갓은 역적 홍경래(洪景來)에 투항한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공이 자기의 친 할아버지인 줄을 모르고 과격한 용어로 지나치게 모욕하는 글을 지어 김익순공을 매도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가 그가 바로 자기 할아버지임을 알고부터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삿갓을 쓰고 온 세상을 누비며 숨어살았다. 오늘의 우리들도 이제부터는 중국의 선진시대(先秦時代)의 문화와 문학과 철학을 우리 “천손족(天孫族)”의 것으로 도로 찾아 통일하여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훌륭한 후손들에게 일깨워주어 긍지(矜持)를 키워 주어야 한다,

   

           3. 한국인은 천손족(天孫族)


   이제까지의 한국 역사책에서는 우리 겨레를 중국 사람들의 역사 기록에 의하여 “예맥(濊貊)” 또는 “한족(韓族)” 또는 “동이족(東夷族)26)”이라고 일컬어 왔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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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白壽彛,『中國史綱要』, (上海人民出版社, 1994) 쪽 41-43.
24) 姜云培외,『神農五千年』, 斯文會, 1995.
25) 奇成度, 『幸州奇氏族譜幷誌狀』, 石版, 1957.
26) 須山卓,『亞細亞民族의 硏究』,日本公論社, 1935.
    梁啓超,『中國歷史硏究法』, 臺灣中華書局, 1974.

    何光岳,『夏源流史』, 南昌江西敎育出版社, 1992.
27) 동이족(東夷族)= 안호상박사는『배달․동이겨레의 한 옛 역사』쪽 165-273 에서 이족(夷族의 대표적 인물로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비롯하여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堯舜禹湯


“거란족(契丹族)”, “말갈족(靺鞨族)”, “선비족(鮮卑族)”, “숙신족(肅愼族)”, “여진족(女眞族)”들은 모두 우리와 다른 겨레 부치로 교육하여 왔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와 같은 한 겨레이다. 이들은 같은 우리 겨레인 것을 중국의 역사가들 특히 한(漢)나라 시대 사마천(司馬遷)이  한족(漢族) 중심의 왜곡된 중화사상(中華思想)과 존주사상(尊周思想)을 바탕으로 분리 차별하면서 그때그때 그들 사가(史家)의 기분에 따라 달리 표현하여 왔기 때문에 후세인들이 볼 때에는 마치 모두가 서로 다른 부족 또는 다른 민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천손족의 성산(聖山)으로 숭앙하여온 저 백두산(白頭山)이 언제나 그 자리에 웅장한 자태로 그대로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인들은 그 백두산을 저희 영토 안에 있는 저희 산이라면서 “장백산(長白山, 중국음 장빠이산)”이라고 하며 여름철 베이징(北京) 올림픽대회를 위한 성화(聖火)를 백두산에서 채화하고, 올림픽 대회를 통하여 온 세계에 저희 산으로 선전하려 애쓰는가 하면, 고구려(高句麗)와 발해국(渤海國)을 저희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 국가라고 하여 중국 역사 속에 편입시키려 안간힘을 쏟는 일과 똑 같은 짓에서 연유된 결과이다27).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는 저들이 서로 다른 종족처럼 이름을 바꾸어 갈라놓은 것을 모두 통합하여 동이족(東夷族)을 중심한 이족(夷族) 곧 천손족(天孫族)으로 보고, 그 정통성을 자라나는 우리 천손족 후손들게 철저히 교육하여 자존심을 가지고 세계 인류 공영(共榮)에 힘써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단제사상(檀帝思想)을 구현시켜 지구촌장(地球村長:지금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런 아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지도자와 봉사자가 되도록 길러야 한다.

   우리 “이족(夷族)”은 곧 하느님의 후손인 “천손족(天孫族)”이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들이 “환한 겨레[桓․韓族]”와 “밝다겨레[檀族․倍達族]”를 서로 다른 겨레로 다루어 앎이 깊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헛갈리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게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천손족(天孫族)” 한 가지로 통일하여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금의 중국 대륙 안에 있었던 진(秦)과 한(漢)나라 이전의 모든 나라들이 전부 우리나라 환한 나라[환국(桓國․韓國)]의 역사로 편입되어야 하고, 또 진(秦)과 한(漢) 이후의 나라들 중에서도 한인(漢人)이 아닌 겨레 부치가 세운 나라들 곧 고구려 발해국은 물론 요(遼), 김(金:금이 아님)까지도 우리 겨레들의 나라로 보고 우리 역사 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28)

 

文武周公)들과 노자(老子)와 공자(孔子)를 들고 있다. 또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청주한씨족보(淸州韓氏族譜)』나『선우씨족보(鮮于氏族譜)』들은 그들의 시조 할아버지를 황제 헌원(黃帝軒轅)으로 하고 있으며,『진주강씨족보(晉州姜氏族譜)』는 그들의 시조 할아버지를 염제(炎帝)로 보고, 염제가 강수(姜水)라는 물가에 살았기 때문에 성(姓)을 강(姜)으로 하여 8세(世)를 이어오다가 상(商)나라 말에 기자(箕子)가 3000명을 거느리고 동북으로 쫓겨 올 때에 대사마(大司馬) 규(逵)공이 함께 따라와 한국의 강씨(姜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행주기씨족보(幸州奇氏族譜)』(1930)는 그들의 조상을 기자(箕子)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사대모화사상에서 나온 억설(臆說)로 볼 것이 아니라 진실(眞實)로 보아야 할 것이다.

28)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우리 조상님들은 한(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이 훔쳐간 “화하(華夏)”라는 낱말     이 본래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우리 조상님들이 건설한 문화를 일컫던 말인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사대사상에 젖어 한족(漢族)을 오히려 “화하(華夏)”라며 존경하고, 본래 “화하(華夏)”인 우리 조상     들을 저버리고,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며 큰 영예로 알아온 잘못이 오늘까지 이르렀다.

29) 권재현,「중국 金나라 시조는 안동 권씨일 것」,『동아일보』26623호,4340. 2.28.

   阿桂외,『欽定滿洲源流考』, 乾隆 43(4111, 1778),

   김원회,『단기고사는 말한다』, 전망, 1994.등에서 거듭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요(遼)․김(金)․원(元)․청(淸)”의 역사와 문학까지 포함하는 일은 후일로 미룬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저희들의 으뜸 조상이라고 하는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는 김교헌(金敎獻:4156-4256, 1863-1923)공의 말에 따르면,


      우리 배달나라 제5세 태우의환웅(太虞義桓雄:B.C 3512-3419)의 열 두 아들 중 막내이      다. 어느 날 삼신(三神)의 영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고 만 가지 이치를 두루 알게 되었      다. 이에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알게 되었다. 는 것이다.29)

 

 

            4. 한국인 어디서 살았나?


   상고시대 환한 나라 사람[환국인(桓國人․韓國人)]들은 앞에서도 잠깐 말한 바와 같이 지금의 중국 대륙에서 잘 살다가 한족(漢族)의 침입으로 쫓기어 본래 살던 고향 땅을 버리고 뒷걸음쳐 동북쪽 또는 서남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30)

   우리들의 조상이 세상에 처음 세운 나라는 “환(桓)한 나라 [환국(桓國․韓國)]”․“밝다나라[단국(檀國)․배달국(培達國)]” 이다. 환한 나라나 밝다나라는 모두가 태양(太陽)인 해와 해가 떠 있는 하늘[天]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환한 나라를 처음 세운 이는 바로 우리 조상님들이 숭모하던 하느님 환인(桓因)이시다. 이 환한 나라[桓․韓國]와 밝다나라[단국(檀國), 배달국(倍達國)] 시대에는 우리 조상님들이 지금의 중국 장수성(江蘇省)과 꾸이주성(貴州省)과 산뚱성(山東省)과 산시성(山西省)과 솬시성(陝西省)과 랴오닝성(遼寧省), 지예장성(浙江省), 허난성(河南省), 허베이성(河北省), 하오베이성(湖北省) 등 넓은 지역에 걸쳐 살면서 화하(華夏)문화를 창조하였던 것이다.31)

    

          5. 한국인의 말과 글

   

   한국인의 말은 곧 환국(桓․韓國)의 국민들이 썼거나 쓰고 있는 하느님의 후손 겨레인 천손족(天孫族)의 언어를 가리킨다.

   우리 한국어는 국어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알타이 말 겨레[Altaic family]에 속한다32). 우리말의 언어학적 특징은 첫째, 홀소리어울림[母音調和], 둘째, 닿소리 법칙[子音法則], 셋째, 첫소리 규칙[頭音規則], 넷째, 끝소리 규칙[末音規則], 다섯째, 교착성(膠着性) 등을 들고  있다.

   이것은 인도유럽 말 겨레인 한어(漢語)와는 전혀 다른 점이다. 우리말과 한어(漢語)가 다른 것에 관하여는 이미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그의 「訓民正音序文(훈민정음서문)」에서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으나,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것이 많다.[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

 


30) 金敎獻저, 高東永역, 『신단민사(神檀民史)』,(뿌리, 1986) 쪽 29.

31) 신용하,「고조선 속국들 서방진출‘게르만 대 이동’초갈」,『동아일보』26704호,2007.6.2.

32) 앞 주 4)의 각종 문헌과 孫淼,『夏商史稿』,(文物出版社, 1987.)쪽 51․652-656을 참고함.

33) 박종국,『한국어발달사』,(문지사, 4329), 쪽 18-40 참조.

    李基文,『新訂版國語史槪說』,(태학사,2006), 쪽 20-37 참조.

 

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其情者多矣]”고 밝히신 바가 있다.

   또 한국인들이 지금 쓰고 있는 글과 옛날의 우리 조상님들이 쓰던 글에 관하여 언어학자로 역사학에 꾸준한 연구를 기울여 온 정연규(鄭淵奎) 박사의 저술『대한상고사』에 의하면,『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근거하여  우리 조상님들의 문자 활용이 다음과 같이 변하여 왔음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환웅(桓雄:서력전 3800 이전)시대에 쓰여진 녹도문(鹿圖文)이고,

   둘째는 자부(紫府:서력전 3800경)시대에 쓰여진 우서(雨書)이며,

   셋째는 복희(伏羲:서력전 3500전)시대에 쓰여진 용서(龍書)이고,

   넷째는 치우(蚩尤:서력전 2700경)시대에 쓰인 화서(花書)이며,

   다섯째는 3세 단제 가륵(嘉勒:서력전 2200경)시대에 쓰인 신전(神篆, 가림토 문자)이고,

 

   여섯째는 세종 25(3776, 1443)년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었다.33)

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정연규박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좀 더 많은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녹도문(鹿圖文)”34)과 “우서(雨書)”와 “용서(龍書)” 및 “화서(花書)”라는 말의 생소함 때문이다. 또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박사의 여섯째에는 중국의 진(秦)나라 이전에 활발히 사용되었던 이른바 갑골문자(甲骨文字)와 종정문(鐘鼎文)이라는 “고한글[(古韓契․환글(桓契)]35)”이라고 하는 옛 한문(桓文→漢文)을 연계하여야 할 것이며, 일곱째에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세종 25(3776, 1443)년에 창제하시었다는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보아야  한다는 소견이다.

   특히 단제 기원 4326(1993)년에 지금의 중국 산뚱성 띵꽁(山東省丁公)지역에서 이른바 “띵꽁문자(丁公文字)”라는 한자(漢字) 아닌 고대문자(古代文字)가 새로 발굴되어 세계의 문자학자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그 대체적 견해는 옛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문자라는 쪽으로 집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36) 는 점과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가림토 문자”를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에 특수 부류에 의하여 사용된 것으로 주장되는 점 등을 종합하여 좀 더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37)

 

   이와 같은 주장들은 이제까지의 우리 학교 교육에서는 전혀 들어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이론들이다. “고한글(古韓契)”이라는 갑골문자는 지금의 중국 대륙 곳곳의 땅속에 묻혀있는 문화재(文化財)들 속에 죽백(竹帛) 또는 금석문(金石文)의 형태로 계속 발굴되어 의문이 많던 『역경(易經)』의 내용을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됨과 동시에 고대 사상사(古代思想史)를 보완할 수 있는 보배가 되기도 한다.38) 이 고한글[갑골문자]은 지금 중국 땅에서 출토된다고 하더라도, 그 글자를 다루어 저술한 사람들은 우리 천손족(天孫族)으로 보아 우리 문학사(文學史)와 우리의 사상사(思想史)에서 다루어야 우리의 잃어버린 전통을 회복하게 된다. 또 “가림토 문자”에 관한 자료는 발해국(渤海國)의 대야발(大野勃)공이 단제 기원 3060(727)년에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와 단제 기원 4244(1911)년에 계연수(桂延壽)공이 편찬하였다는『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39) 가림토 문자는 38자로 되어 있으며, 그 모양은 훈민정음과 비슷하다고 한다.

   필자는 현재로서는 “고한글(古韓契, 현재 중국에서 많이 연구되는 갑골문자)”과 “가림토 문자”에 의하여 창작된 문학작품을 찾지 못하였기에 여기서는 소개하지 못하지만, 앞으로 혹시 땅 속에 묻혀 있던 문화재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 본다. 비록 오늘날 중국의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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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鄭淵奎,『대한상고사』,(한국문화사, 2005), 쪽 250 참조.
35) 녹도문(鹿圖文)은 최육당(崔六堂)에 의하여 지금 경상남도 남해군의 바위 위에 그림으로 그려진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徐市過此]”는 뜻의 사슴뿔 모양의 선으로 된 문자를 이른다면, 정박사가     지적한 연대가 일치하지 아니한다. 속설에 의하면, “서불(徐市)”은 진시황(秦始皇) 때의 신선이기      때문에 정연규박사의  “환웅시대 B.C.3800 이전”에 “녹도문”이 쓰이었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36) 陳泰夏,『東方漢字 뿌리』,(이화문화출판사, 1997), 쪽 9-10 참조 .
   금일권,『한글의 신비[桓契神秘]』,천부동사람들, 2005.
37) 김경일,『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 (청맥, 1996) 쪽 241-247. 필자는 이 글자가 바로 녹도문    (鹿圖文)이 아닐까 생각한다. 
38) 정연종,『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죠이징 인터내셔날,1996.

    금일권,『한글의 신비』, 천부동사람들, 2005.

 

출토된다 하드라도 그 시대가 진(秦)나라 이전으로 소급될 때에는 그 글자의 원 작자들은 우리의 위대한 조상님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허신(許慎)공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전략) 왕망(王莽)이 태사공(大司空) 견풍(甄豊)을 시켜서 문서의 부를 바로잡아 고 치게 하니, 견풍이 스스로 생각하여 응제하여 옛글을 상당히 많이 고치어 새로 만들었      다. 그 때에 6서가 있었으니, 첫째는 옛글이니, 공자(孔子)의 집 벽속에 있던 것이다. 둘      째는 이상한 글자[奇字]이니, 곧 옛글과는 다른 것이다. 셋째는 전서(篆書)이니, 곧 소전      (小篆)이다. 넷째는 좌서(左書)이니 곧 진(秦)나라 예서(隸書)이다. 다섯째는 무전(繆篆)      이니, 모인(摹印)이다. 여섯째는 조충서(鳥蟲書)이니, 가로로 길게 늘어뜨리어 펴서 썼기      때문이다. 이를 일컬어 “신육서(新六書)”라고 한다.40)


고 한 것에 따르면, 선진시대(先秦時代) 문학들은 오늘날의 한문 기록과는 달랐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이른바 선진시대 제자백가서들은 모두 한나라 시대에 넘어와서 한인(漢人)들에 의하여 새로 기록 창작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고 나는 주장한다. 다만 우리 조상님들이 지금의 중국 대륙에서 쫓겨난 뒤에 바로 그 조상님들의 저술들을 복원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문제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하다. 중국 대륙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타향으로 밀려나 새로운 고장에 정착하려다 보면, 제1차 생명보전이므로, 생명보전의 길에만 모든 신경을 쓰다 보니, 문화 보전이나 복원의 일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또 생활의 터전을 만들어 살만 하면, 다시 외래자의 침입으로 쫓기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다고 보아진다. 그 예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를 놓고 보더라도 고구려가 집안(集安)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의 남쪽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완전히 잊어버린 역사로 치부되고 말게 된 사실이나, 신라 문학의 보고인 『삼대목(三代目)』같은 책이 사라진 뒤에 지금 1,000년이 넘어도 복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과 같은 이치로 풀이하면, 그리 억설이 되지는 아니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들은 앞으로 bar04_solid1x1_darkblue.gif 

 

39) 李學勤저,林亨錫역,『잃어버린 고리(신출토문헌과 중국고대사상사)』,학연문화사,1996.
40)
정연종,『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죠이징 인터내셔날,1996) 쪽 207-224.
    임승국,『한단고기』,(정신세계사, 1986). 쪽 67-68.
41)“說文解字序云․․亡新居攝使大司空甄豊等校文書之部自以爲應製作頗改定古文時有六書․․一曰古      文孔子壁中書也二曰奇字卽古文而異者也三曰篆書卽小篆四曰左書卽秦隸書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     書所以書旛信也此之謂新六書.”(李時,『國學問題五百』,天津市古籍書店, 1986에서 인용함)
.


끊임없이 선진시대(先秦時代) 문화유물이 중국 대륙에서 발굴되면 그것은 우리 조상님들의 유물임을 증명하여 지속적으로 우리의 겨레사와 문학사와 철학사와 종교사를 포함한 천손족의 진정한 문화사(文化史)로 보완하여 천손족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여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찾고, 본래의 나를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길밭 최강현 /한국 기행문학회장 前 홍익대 교수

출처 : 정자 솔
글쓴이 : 정자 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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