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大幹第卄三次鳥嶺山區間縱走
(백두대간 제 23차 조령산 구간 종주 -6. 16)
鷄立梨花鳥嶺由:계립이화조령유
神仙炭項釜峰留:신선탄항부봉류
山崎路險跫端亂:산기로험공단란
關壯城殘史蹟幽:관장성잔사적유
繩索攀登雲裏蜃:승삭반등운리신
石巖踞坐霧中樓:석암거좌무중루
綠香浸袂風猶爽:록향침몌풍유상
體困身疲口歌謳:체곤신피구가구
계립령, 이화령과 문경 새재 지나면서
신선봉, 탄항 산봉, 부 봉에 머무른다.
산 거칠고 길 험함에 발길이 어지럽고
관문 높고 성 허물어져 역사 자취 그윽하네.
밧줄 타고 올라감이 구름 속 신기루요
바위에 걸터앉아 안개 속에 누각 된다.
녹음 향기 소매 들고 바람 오히려 상쾌함에
몸 비록 피곤하나 입은 노래 불러진다.
백두대간 제 23차 조령산구간을 종주하고
2009년 6월 14일 일요일. 대간 제 23차 종주일이다. 새벽 4시에 출발을 하가에 3시에는
일어나야 하는 부담은 있으나,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린지라 갈아입을 옷가지까지 챙
기고 나선다. 여러 차례 올랐던 조령산이라 낯익은 이화령에 도착하니 7시다. 준비를
마치고 산행이 시작되는데 비교적 순탄한 길이라 여유를 부리며 오른다. 조령 샘 물맛
을 보고 이어 해발 1.025m의 정상에 오르니 8시 10분. 한 시간 정도가 걸린 셈이다.
사진을 담고 상봉 식을 마치고 바로 진행하는데 구름이 짙어 지더니 빗방울도 던져 배
낭에 덮개를 씌우면서 간다. 3관문을 향하는 길목부터 밧줄에 매달리며 바위벽을 오르
내리기 시작한다.
9시 9분에 신선 암 갈림길을 지나고, 10시 50분에 깃대 봉 갈림길에 이러러 서도 힘을
아끼자면서 그냥 지나치고 보니, 흐려지는 날씨에 조망이 없어 아쉽기는 해도 암 봉들
이 빚어내는 절경에 탄사를 보내며 아기자기한 암릉 길을 타넘는 재미에 3관문 까지는
언제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인근에 월악산, 주흘산, 조령산 신선봉 같은 명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북쪽과 남쪽에는 각각 예부터 이름난
두 줄기 길이 있다. 북쪽의 길은 신라가 국력의 팽창에 따라 북진정책을 위해 이곳 백
두대간에 처음으로 뚫은 하늘재(지름재)요, 남쪽의 길은 조선시대에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그 유명한 문경 새재 고갯길이다. 당시에 [황간의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떨어져버리고, 풍기의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처럼 미끄러
져 과거에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문경 새재를 넘는다]는 속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한편 하늘 재는 평강공주와의 로맨스로 삼국혈전사의 한 장을 빛낸 온달장군이 신라에
게 빼앗겼던 [계립현과 죽령 서쪽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전했다가 단양군 영춘면 하리 소
재의 아단성- 근래 들어 온달산성이라고 불리는 석성에서 전사한 바 있는 바로 그 계립
현으로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 석문리와 경북 문경시 관음리를 잇는 해발 500m의 고갯길
이다. 새재 고개 마루에는 사적147호로 지정된 제3관문 조령관이 있다. 조령관은 예부
터 교통의 요지요 군사적 요충이어서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장부 1인이 능히 만 명의
적을 막을 수 있는 천험의 요새인 이곳을 포기하는 대신 열세의 군사력으로 충주 탄금
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퇴한 사실은 유명하다
조령 약수로 식수를 보충하고 사진을 담으니 11시 12분이다.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계
획은 되어 있으나 ‘밥 먹은 배를 안고 힘겹게 오르는 것 보다 마패 봉에 올라서 먹자’
는 말을 했더니 동조자가 많다. 이미 숲 속 식당 앞 식탁에 자리하여 막걸리 파티를 열
고 있는 중이다. 먼저 와서 자리하고 있던 '매화‘께서 큰 오라버니를 ’원샵‘ 제의까
지 하며 챙기는 맛에 동동주 두 잔을 마시고 만다. 모두가 그러하지만, 특히 매화의 마
음 씀에서는 나이의 벽을 헐게 한다. 후미에게 자리를 비워주고 일어서 오르는데 술기
운이 돌아 다리에 힘이 빠진다. 나뿐만이 아닌 듯 숨차다는 소리가 앞뒤에서 들린다.
11시 56분에 올라선 해발 927m 의 ‘마패 봉’. 정상 석에는 ‘마역봉’으로 되어있다.
몇 해 전에 동문 산악회에서 오른 바 있는 이 마패봉은 암행어사로 이름난 박문수가 조
령관 위 봉우리에 마패를 걸어놓고 쉬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령관(제3관문)을
사이에 두고 깃대봉과 마주하며 충북 쪽으로 신선봉과 맞닿아 있다. 지도에는 마역봉이
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 지방에서는 마패봉이라 부르고 있다.
조금 내려서서 넓게 펼친 바위를 식탁 삼아 점심을 먹고는 다시 진행한다. 13시 25분에
부봉 갈림길에 이르러서는 일부는 직진했으나 배낭을 내려놓고 여기는 올라보기로 한다.
오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다. 조금 오르니 3관문에서 뒤쳐진 하 회장 팀이 내려오고
있다. 지름길로 온 것 같아 “땜빵 팀이구나.” 하면서 바위를 타고 오르니
부봉(釜峰-917)이다. 옆에 분묘가 있는데, 터는 괜찮아 보이나 예까지 오르느라
‘꽤 힘들었겠다’ 는 생각이 든다. 이때 시각 13시 50분. 다시 내려 주흘산 이정표가
붙은 쪽으로 진행하는데 내린 비로 길이 질척여 옷과 신발이 흙투성이다. 14시 32분에
주흘산 갈림 길에 도착하는데 하늘 재 길은 왼쪽으로 90도 각도로 꺾어 급경사로 미끄
러져 내린다. 14시 56분에 평천 재에 내려서고 다시 오르는데 이제는 길은 좋은 편인데
힘이 지친다. 점심을 끓여온 ‘쇠고기 죽’을 먹었더니 허기증이 느껴져 탄항산 정상을
눈앞에 두고 배낭을 내려 간식을 찾는데 뒤따르던 아우가 초코파이를 내어준다.
힘을 얻어 바로 올라 해발 856m 의 탄항산(炭項山 일명 월항삼봉) 정상 석에 서서 기록
을 남긴다. 상주 문경 지방으로 오면서부터는 한자를 병기하고 있어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시를 지어야 하는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15시 28분에 굴 바위를 지나고
766봉을 올랐다 내리니 물소리가 들린다. 능선에 세워둔 하늘 재 탑에 올라 사진을 찍
고 호스에 쏟아져 나오는 물에 머리를 감고 신발을 씻고는 하늘재 도로에 내려선다.
이때 시각 16시 9분이니 9시간을 걸었다. 지름재, 계립령, 대원령으로도 불리는 하늘재
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로서 신라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서기 156년)
에 북진을 위해 개통한 곳이다. 죽령보다 수년 먼저 개통된 하늘재는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
강으로 진출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충청북도 자연환경명소 100선 중
10걸로 선정된바 있다고 하나 문경 쪽엔 10년 전부터 도로가 포장이 되었으나 충북은
그대로여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산행 소개 시에 48개 정도라던 것으로 겁나게 하던 것이 60개도 넘는 밧줄에 매달려 오
르내렸는지라 다리보다는 팔이 더 뻐근하게 느껴진다. 대간의 절반가량을 종주한 지금
이다 싶어 격려하는 뜻에서 하 회장에게 ‘두운(頭韻)으로 昊山自律河台岩長을, 中韻으
로 白頭大幹縱走記念’을 넣어 한시 작품을 만들어 전달했는데 본인은 물론 회원들도
기뻐하는 마음들이다. 이런 것으로라도 챙겨주는 아우들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음에서
이 나이에 대간 종주를 할 수 있는 건강의 허용에 버금가게 늦깎이 한학도로서의 보람도
느끼게 된다. 여기 다시 시원한 맥주와 시원한 식초챗국 밥이 행복감을 더 보탠다.
(858)炎天促萬物盛
(더운 여름이 만물 번성을 재촉 한다 -6. 17)
雲峰盛起夏三初:운봉성기하삼초
天戾飛鳶澤潑魚:천려비연택발어
野綠山靑禽獸躍:야록산청금수약
蒸炎苦熱促繁如:증염고열촉번여
구름 봉 성히 이는 여름 석 달 그 처음에
솔개 날아 하늘 닿고, 못에 고기 뛰는구나.
들 푸르고 산 푸른데 날 길짐승 약동하니
찌는 더위 고통 열기 만물 번성 시키누나.
(859)道路(길 -6. 18)
人行踏地處多名:인행답지처다명
逕徑途塗路嶝程:경경도도로등정
道何德語兼稱意:도하덕어겸칭의
身體樞機首重明:신체추기수중명
사람이 땅을 밟고 가는 곳 이름 많아
逕, 徑, 途, 塗, 路, 嶝, 程 등, 길 이름 있음인데
道자는 어찌하여 덕과 말한다는 뜻 겸했나?
신체의 중추 되는 머리 중함 밝힘인가!
일일일수 제 283 신
松亭(정자 솔) 朴載鎬 鎬朴印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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