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南正脈第三次龍蹄山大岩山區間縱走♣
낙남정맥 제 3차 용제 산, 대암산 구간종주
龍蹄山與大岩山:용제산여대암산
金海昌原兩市間:김해창원양시간
鸛鳥峰荒塵積野:관조봉황진적야
短長嶺割道通關:단장영할도통관
不時雪朶枝枝發:불시설타지지발
有別蘇塗塔塔頑:유별소도탑탑완
獻爵盡誠祈願祭:헌작진성기원제
天神應感日和還:천신응감일화환
용제산과 대암산이 더불어 있는 구간
김해와 창원시가 그 사이에 있음이라.
황새봉은 거칠어져 먼지 쌓여 들판 같고
단 고개 장 고개는 잘려 도로 관통했네.
때 아닌 눈꽃송이 가지마다 피어있고
유별나게 성지 있어 탑마다 완만하다.
정성 다해 잔 바치며 기원 제를 올렸더니
하늘과 신 응감하여 날씨 화창 하여지네.
2010. 3. 7.
♣낙남정맥 제 3차구간 종주 ♣
김해추모공원- 황새봉-냉정고개-용지봉-대암산-남산치
2010년 3월7일 일요일. 비 소식에 우의까지 챙기고 집을 나선다. 새벽길이 한산하여
동해정비공장에 도착하기까지 15분이 채 안 걸린다. 종주 회원만으로도 30명이 넘는
다는데 비 탓인지 예정시간 7시를 훨씬 넘겨서 출발을 하는데도 좌석이 많이 빈다.
언양휴게소에 잠깐 들렸다가 2차시의 하산 주 자리인 김해추모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9시 16분이다.
이 자리에서 안전을 비는 기원 제를 지낸다기에 독축 등 주선을 하고 음복을 하고
산행을 시작하니 9시 54분이다. 10시 23분, 황새 봉 정상 도착 까지는 선두 구릅에
따라붙다가 사진을 찍고 ‘정자 솔’ 리본을 달다보니 자연히 2진이 되어
진행하는데, 그래도 시속 3km는 넘는 속도다. 11시 10분에 인동 장공 묘소에 올라서
고 조금 지나니 체육 시설과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곧 임도에 내려서고 10분 쯤
진행하다가 숲속으로 진입하여 11시 50분에 다시 임도를 만난다. 곧 이어 농장이
나오고 월동하는 양봉장도 산기슭에 보인다.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아래로
뚫려진 굴속을 11시 53분에 통과한다. 국도에 도착하여 경남축산진흥연구소까지
가서 길을 물어 냉전고개에 되돌아오니 후미가 앞서고 있다. 진례면 안내 표석에서
사진을 담으니 12시 7분이다. 전투경찰대 못 미쳐 공터에서 선발대가 점심을
먹으며 기다린다. 우리도 자리를 편다.
12시 45분에 다시 오르기 시작하는데 한참동안 된비알이 계속된다. 막걸리 밥 반주
에 취하고 배가 불러 천천히 따라 오르다보니 2진에서도 뒤쳐진다.
지나온 황새봉과의 거리 6.1km의 푯말이 서있는 능선에 올라서니 12시 50분이다.
2진에 합류하고자 추월하며 속도를 내어본다. 봉우리 지점에서 따라붙는데 금줄을
쳐놓고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헤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자연훼손에의
가슴앓이가 산 꾼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바라 하겠다. 우회하여 능선을 타고 가니
측량 삼각점이 나오고 473.2m 봉 표시가 나뭇가지 높이 달려있다. 이때 시각 13시
20분. 얼마를 진행해 오르니 봉우리에 커다란 바위들이 버티고 있는데 바위 틈새에
소나무가 분재처럼 붙어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504봉인 것 같은데 13시
24분이다. 13시 37분에 임도를 건너 다시 오른다. 용지봉 1.4km 지점 표석을
지나니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있다. 김해 구간은 비가 되고, 창원 구간은 눈이
되어 내렸다. 진행하면서 점점 은세계 절경을 더해간다. 멀리서 보기에는 눈이
덮여 아이젠 생각을 했는데 들어서고 보니 길에는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용지봉
정상 못 미쳐서 전망바위가 앞뒤로 설경을 거느리고 버티어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하는데 김해와 창원을 가르는 능선이 일목요연하게 바라다 보인다.
14시 27분에 올라선 해발 723m의 용지 봉, 한문 표기로는 분명 용제봉(龍蹄峰)인데
지도와 이정표에서는 ‘용지 봉’으로 적고 있어 헷갈리게 한다. 사진을 담고
후미를 기다리며 팔각정에 올라 질음 시조창 한가락을 부르며 기염을 토해본다. ‘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그 사이에 2진도 떠나고 없어 따라붙는데 내리는 길이 바윗길이고 미끄러워
위험하다. 용지봉과 대암산 중간 지점을 조금 지나니 길가에 돌탑들을 여러 개
쌓아두었는데 마침 산행 온 부부가 쉬고 있어 사진 한 컷 부탁을 하고는 그냥
내닫는다. 15시 28분에 2진을 따라 붙으니 “방금 저 건너 산에 보였는데
날아왔어요?” 하기에 “남이 안 볼 때는 축지법을 좀 쓴다.” 하며 받아 넘긴다.
능선에 올라서니 성채의 흔적이 파여 있고 쉼터도 지어놓았다.
해발669m 대암산을 적은 쪼그마한 표석을 끌어안고 사진을 박으니 15시 32분이다.
이 산 전체가 바위 덩어리로 되어있어 대암산이라 이름 했단다.
발아래 창원시를 내려다보면서 능선을 따라 내리는데 다음 구간에 오를 ‘
비음산’이 바라다 보이고 어림잡아 그 못 미쳐 있는 봉우리를 넘어야 하산
지점인 남산치가 될 것 같다. 아침 출발 시에 산행 설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용지 봉’에서 하산하기로 계획했으나 날씨도 개인데다 참석자 모두가 건각들
이어서 코스를 늘여 변경하게 된 것이다. 15시 39분에 ‘장군바위’를 지나고
15시 58분에 ‘내대암봉’을 올랐다가 16시 12분에 드디어 ‘남산 치’에
도착한다. 곧바로 하산을 하는데 접속 구간이 너무 지루하다. 혹시나 길을 잘못
잡았나 싶어 전화로 확인까지 하며 내려서 고속도로 지하 터널을 통과하여
체육공원 앞에 도착하니 16시 47분이다. 접속구간 내리는 데에 35분이 걸린
셈이니 다음 구간 시작이 걱정된다. 선두 구릅들이 막걸리 15병을 다 먹어치웠
다며 추가로 불러 잔을 권한다. 이 짙은 인정을 어찌 마다 하랴! 곧 이어
후미들이 도착하고, 맛나게 끓인 닭 개장으로 배를 채우고 18시가 좀
지나서 귀로에 오른다.
♣蒼山齋記 ♣
倚之舞龍山雄勢臨之太和江碧波有齋翼然者密陽朴氏爲其先祖崇德殿參奉諱世發號
蒼山而築之系出 新羅始祖赫居世大王卄九世景明王長子密城大君諱彦忱後也又有七
傳至 麗曰彦祥官都評議事而五傳入近 朝諱穉官贊成諡靖節顯祖也高祖諱孫號聽竹
齋官宣武原從功臣 贈嘉善刑曹參判蔚山忠義祠配享曾祖諱文號野窩官察訪壬亂倡義
父子同殉祖諱宗立考諱以昌也公生乎名閥以粹美之資穎悟之才修業與士友而學聚問
辨修身以斯道而仁行安居意不在於人爵而好樂天爵身不求於名利而優遊泉石卓孝養
志以奉父異友疾恙嘗糞以恭兄內而崇祖睦族外而親賢侶士蔚然鄕省之望以任崇德殿
參奉之榮沒世不忘謀議鳩財聊築一齋纔免風雨日月悠久而新變舊物時世滄桑而形喪
美觀後孫衆議重建增築遠仍近裔輸誠送財遂成輪奐之大廈速客告落之盛筵族親益魯
氏訪余請以上樑文記文及告由文焉固辭以不文託意懇而切也吾亦同根異枝之末葉故
終乃不獲謹按略敍之矣扁之蒼山者隨以雅號也其實公之樂山樂水意趣之發現而幽人
不染於紅塵以察察乎心身者哉耶西勢東占之餘波以傷倫廢道之季世際父不其父子不
其子祖不其祖孫不其孫者在在有之今而貴門能成此崇之大業其誠可頌雖然不修他事
惟以築齋舍奉俎豆謂子孫之道則末矣必也講讀詩書禮樂於斯以學行孝悌忠信明吾道
於百世扶人倫於千秋眞爲美也歟花樹之情感祝敢望矣
新羅紀元二千六十七年白虎之歲泰月
日月詩易硏究會長密陽朴載鎬謹撰
무룡산의 웅장한 기세에 기대어 태화강 푸른 물을 바라보며 나라갈 듯한 재실이
있으니 밀양 박씨가 그들의 선조이신 숭덕전 참봉 휘 ‘세발’ 호 ‘창산’을
위해 세운 것이다.
신라시조 혁거세 대왕으로부터 이어 나와 이십 구세 경명왕 장자 밀성대군 휘
‘언침’의 후손이다. 또한 칠세를 전해와 고려조에 이르러 가로되 ‘언상’은
벼슬이 도평의사요, 5세를 전해 근세조선에 들어와서 휘 ‘치’는 벼슬이 찬성
이요 시호가 ‘정절’이니 크게 드러난 조상이다. 고조부는 휘‘손’이요 호
‘청죽재’이니 벼슬이 ‘선무원종공신’이며 가선대부 형조참판을 증직 받았
으며 울산 ‘충의사’에 배향되었다. 증조부는 휘 ‘문’이니 호 ‘야와’요 관
은 찰방인데 임진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고 아버지와 함께
순국하셨다. 조부 휘‘종립’이고 고 휘‘이창’이다.
공께서는 명문에 태어나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질과 영리한 재주를 지녀서
선비 벗들과 더불어 수업하여 배워서 모우고 물어서 분별했으며, 선비도로 몸을
닦아 어짊을 행하고 편안히 사셨으니 뜻이 사람 벼슬에 있지 않고 仁義禮智樂
善不倦(인의예지낙선불권)의 하늘 벼슬을 좋아 하시고, 몸은 명예와 이익 됨을
구하지 않고 자연을 찾아 넉넉하게 놀았다. 효성이 뛰어나서 부모를 섬기되
몸은 물론 마음을 즐겁게 봉양하였고, 우애가 남달라서 형이 병환에 듦에 변을
맛보아 약을 구하여 공경을 다하였다. 안으로는 조상을 숭배하고 가족 간에
화목하고, 밖으로는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선비와 벗 사귀니 향리에서 우러러
보아, 숭덕전 참봉의 영광도 맡게 되었다. 돌아가신 뒤에도 잊지를 못하여서
의논하여 애오라지 재실을 지어 비바람을 막게도 되었다. 세월이 오래됨에 새
집이 구물이 되고, 세태가 상전벽해로 변함에 형상도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지라
여러 후손들이 뜻을 모아 느려서 다시 짓기로 결의 하니 원근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이 정성과 재물을 보내어 모아 드디어 둥그렇게 높이 짓고 손님을
초빙하여 낙성을 고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열게 되었다.
족친 익노 씨가 나를 찾아와 상량문, 기문 그리고 고유문을 부탁하기에 내 글
없음을 들어 고사하였음에도 그 뜻이 너무 간절하고 내 또한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 끝 잎이라 마침내 뜻을 굽히어 살펴보고 간략하게 적기로 한다.
‘창산 재’란 편액은 공의 아호를 따른 것이라 그 실은 공께서 요산요수 자연
을 즐긴 뜻과 취향이 나타나고 있어 숨어사는 선비는 홍진세파에 물들지 않고
몸과 마음이 맑고 깨끗함의 표현이라 하겠다.
서양 세력이 동양을 점령해 들어온 여파로 해서 인륜이 상하고 도덕이 무너진
말세의 현상이라, 아비는 그 아비 노릇을 못하고 아들은 그 아들 노릇을,
조상은 조상답지 못하고 후손은 후손 노릇을 못하는 것이 있고 또 있는 실정
인데, 지금 귀문에서는 능히 이 우뚝한 대업을 이루었으니 참으로 칭송 받을
만 한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일은 닦지 아니하고 오직 재실을
지어 조상 봉제사만으로 자손의 도리를 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반드시
끝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시서예악을 강독하여 배운 것을 효제충신의
실행함으로써 우리의 도를 백세에 밝히고, 인륜을 천추토록 잡아 둘 수 있게
하여야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되지 않겠는가! 화수의 정으로 감축하며
감히 바란다.
신라기원 이천 육십 칠년 백호지세 태 월
일월시역연구회장 밀양 박 재 호 삼가 짓다.
松亭(정자 솔) 朴載鎬 鎬朴印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