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저장실

[스크랩] 중국 화산 등반기

정자 솔 2007. 8. 9. 22:33

 
    華山登攀(화산등반) 화산을 등반하고 華夏華山五嶽宗(화하화산오악종):중국나라 서악 화산 오악 중에 으뜸 되니 東西南北又中峰(동서남북우중봉):동봉 서봉 남 봉 북 봉 또한 중봉 솟아있네. 仰觀恰似飛龍勢(앙관흡사비룡세):쳐다보면 용이 나는 기세와 흡사하고 俯瞰分明伏虎容(부감분명복호용):내려 보면 분명하게 호랑이가 엎드렸다. 穿地仙宮靑靄繞(천지선궁청애요):땅을 뚫은 신선 궁궐 푸른 안개 자욱하고 揷天嶂頂紫霞濃(삽천장정자하농):하늘 꽂은 산이마에 붉은 노을 짙은지고. 壯嚴雄大神靈境(장엄웅대신령경):장엄하고 웅대하며 신령스런 경개기에 使客騁懷數止笻(사객빙회삭지공):나그네 마음 뺏겨 자주 발길 머문다오. 2007. 7. 27. 松亭(정자 솔) 朴載鎬
화산 태백산 트레킹 후기

      -  셋째 장아에게 노익장을 자랑하마! -
     제1신 
  한 해에 그것도 같은 나라를 연거푸 나들이 산행을 한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만, 4박 5일간을 다녀와
서 국내에 이틀 머물고는 다시 3박 4일의 해외산행을 가지게 되었구나. 뒤의 3박 4일은 해마다 동창산악회가 수년 전
부터 가져왔던 바로, 일본의 후지산, 중국의 황산, 대만의 옥산에 이어 금년에는 중국의 태산을 오르기로 계획이 이
미 세워져 있었는데, 이번에 화산과 태백산의 등반은 낙동정맥 종주 대를 총괄하는 손 동학이라는  후배가 자기 할아
버지 문집 번역과 병풍 글씨를 써 주었다고 트레킹 비용을 이미 지불해 놓았기에 따라나서게 되었단다.
  2007년 7월 26일 목요일, 엊그저께 시조창 발표회를 가졌기에, 모여 마무리할 일도 있고,  노인복지회관에 강의를 
나가야 하는 날이지만 모든 것들을 접어두고 출발을 했지.
  6시 50분, 포항시 죽도파출소 뒤편 복개 천 도로 옆에 주차를 해두고 내리니 리무진 관광버스가 도착한다.  속속 도
착한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하여 언양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는 차를 몰아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시각은 8시 40분. 
휴대폰 로밍을 하고 환전을 한 뒤 KE 891 기에 탑승 이륙하는데 시간을 보니 11시 15분이었어. 11시 40분에 맥주를, 
12시 35분에 기내식이 공급되더니 서안공항 착륙 진동이 오기에 시간을 보니 오후 2시22분, 3시간이 조금 더 걸린 셈
이지.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시차가 1시간이나 이 글을 쓰는데 혼동이 올 것 같아서 시계를 한국 시간으로 그냥 두
고 기록하기로 한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신세계여행사 이 경철이란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관광에 나서니 오후 3시 10분이었지. 
불타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는 진시황의 아방궁 까지 이동하는 동안 여러 가지 설명을 들었으나 다는 기록을 할 수 없
더구나. 지금 서안의 인구는 848만 명으로 서부의 중심도시로 만들어가고 있으며, 위수가 흐르고 있으나 강우량이 연
간 600mm밖에 되지 않아 주로 밭농사를 짓기에 밀가루 음식이 주식이고, 13 왕조의 도읍지로 5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600년 역사를 가진 북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도 하더군. 위수 상류에는 조어 대(釣魚坮)라는 곳이 있어 
주 무왕이 낚시하는 강태공을 만난 곳으로 유명하고, 56,250평방km 넓이의 진시황능, 두 번째로 크다는 당 고종과 측
천무후의 합장 능을 비롯하여 70여개의 황 능이 있다는 등의 자랑을 듣는 가운데 버스가 아방궁에 도착하였어.
 현재 복원된 궁이 본래의 5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어마어마했고, 뒤편에 연못이 있는데 난지호(蘭池湖)
라 하며 일명 ‘연지호’라고도 불렀다는데, 위수의 맑은 물을 끌어 드려 만든 호수였는데 당시의 많은 궁녀(700명)들
이 아침마다 세수를 하여 연지 씻긴 물이 붉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전국칠웅을 통일하였기에 궁 안에 여섯 소궁을 
두어 천하통일을 상징했다고도 했다. 
  다시 이동하여 장안 성에 올랐는데(5:00) 13. 7km둘레의 이 성이 처음에는 토성으로 쌓았는데 명나라 때에 지금과 
같이 벽돌로 다시 쌓았던 것을 말끔하게 보수를 해 놓았구나.
토성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의 황토 흙은 비를 맞아도 허물어지지 않아 옛날 사람들이 토굴처럼 주거지를 만들어 살았
던 흔적이 성벽처럼 남아 있기도 했는데, 성벽 바깥쪽에는 황토에 석회와 이 지방에 많이 생산되는 키위 과일을 섞어 
쌓으면 굳어서 돌과같이 단단해진다고 했다. 토성일 때에는 지휘하는 장군이 말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기에 지
금도 성 위의 폭이 만리장성의 세배가 되어 보였지. 성위를 왕복 5km 넘게 걸으면서 장안 시내를 내려다보니 초현대
식 건물과 낡은 집들이 섞여있어 우리의 80년대 도시를 연상시켰단다.        성벽 주위에는 국토 3분의 1 녹화 정책
에 따라 환성공원을 만들어 놓았는가 하면, 개발환경 조성에 필요한 땅은, 나라 땅이라 환수는 하면서도 국가가 이주
비를 지원하고, 농사를 짓던 사람에게는 농업 소득을 보상해 주는데, 땅 값이 올라가면 그에 비례하여 지원하기 때문
에 농민 부자가 생긴다고도 한다. 공산국가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정책인 것 같더구나.
6시 40분에 관광을 마치고 중국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에 들어 여장을 풀고는 다시 나와 야시장 구경을 갔
는데 처음에는 사람에 받쳐 구경을 제대로 못하고 나중엔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백화점에 갇혀 있다가 우산을 사서 
들고서야 차에 올라 돌아올 수 있었다.  10시 40분에 숙소로 돌아왔는데 한방을 쓰게 된 황종운이란 사람이 흥해에서 
비닐하우스로 토마토를 재배하는 분으로 농촌지도자 출신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워하
며 돌아올 때까지 잘 챙겨 주었구나.
 차편으로 이동하면서 생각해 둔 ‘아방궁’과 ‘장안성’에 대한 한시를 적어두고 잠을 청했단다.
          제 2신
2007년 7월 27일 금요일. 7시 모닝콜 예정이었으나 평소의 습관 때문인지 6시도되기 전에 잠이 깨어 샤워를 하고는 호
텔 식당에서 양식 뷔페로 아침을 먹고 8시 30분에 출발하여 화산을 향해 출발했지. 9시 35분에 휴게소에 들렸다가 다
시 출발하여 9시 35분에 화산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11시 10분에 주차장에 도착하여 여기서부터는 셔틀버스로 이동을 
했는데 버스에는 ‘中國移動通信’이라 적혀있더군. 들어서는 입구부터 깎아지른 절벽에 차가 부딪힐  것 같은 느낌
이 들 정도였는데, 25인승 정도의 미니버스가 부지런히 오고가기에 헤아려 보았더니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오는데 15
대가 지나가더군. 관광객이 많다는 말이 되지.
  11시 30분에 케이블카에 도착하여  타고 오를 사람과 걸어오를 사람 편을 가르는데 17명 일행 가운데 네 사람밖에 
안되는 걷는 팀에 이 아버지가 끼어드니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 “산 타려고 돈  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왜 
안 걸어?” 하면서 오르기 시작하는데 전부가 계단으로 된 길이라 피곤은 했어도 낙동정맥 종주하는 기분으로 올랐
지. 12시 10분에 ‘北峰飯店’이란 가게가 하나 있고, 앉을 자리와 그늘이 있어서 쉬었는데 여기서 안경을 벗어놓고 
가는 바람에 밟혀 못쓰게 되어 버려야 했구나. 12시 40분에 두 번째로 쉬고 하늘 높이 치솟은 바위산 절경을 감상하
며 천천히 오르니 오후 1시 25분에 케이블카에 도착이 되더군. 다른 사람들 7분에 오른 길을 2시간 걸려 등반을 했단
다. 올라올 때는 우리들 외에는 내려가는 사람들만 혹 있었는데 여기에 이르니 사람에 밀려 진행하기조차 어려울 지경
으로 사람들이 많더군. 곧 이어 북 봉 정상에 올라 ‘華山論劍’이라 써져 있는 바위에 잽싸게 달려들어 사진을 담고 
내려오다가 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바위 아래서 남들이 하는 대로 한 컷 담고는 동봉으로 가는데 오르막 돌길
에 늘어선 사람 줄이 장관이더라. 가이드는 20대 젊은 사람이라 기다려 가며 안내를 하는데도 사람에 밀려 자칫 몇 
안 되는 사람끼리도 놓지 기가 일 수였어. 케이블카 팀들과 통화를 하니 거기서도 점심을 먹는다기에 오후 2시 30분
에 휴게소 탁자를 빌어 점심을 먹으니, 마른 도시락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아 찬물을 한 병 싸서 말아서 억지로 먹었단
다. 중봉을 거쳐 오후 4시에 동봉에 도착하니 간혹 안개가 걷혀 들어내는 절경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럴 때는 바위에 올라 앉아 시조창을 냅다 지를 수밖에……. 저 아래로 절경을 이룬 바위 위에 정자가 하나 서 있는데 
달걀이 깨어나는 뜻의 글씨를 쓴 안내판이 있고 빌려 줄 암벽 등반 장비를 걸어둔 것으로 보아 자일을 타고 정자로 
갈 수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멀리서 사진만 담았는데 내려와서 바둑을 두는 정자란 뜻의 ‘下棋亭’이라 한다. 네 사람
이 혹은 단체로 혹은 혼자서 이리 찍고 저리 박으며 사진을 담고 내려오는데 일행 한분이 점심 먹은 것에 체했는지 주
저앉는다. 손 후배가 청심환을 먹게 하고 등을 두드리고 하더니 따라 올라와 다행이었어. 남 봉 정상인가 하고 오르는
데 정상은 아니고 전망은 너무 좋다. 여기서 일부 카 팀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옆으로 보니 거의 수직인 천길 낭
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암벽을 타고 있다. ‘長空棧道’라는 곳인데 나중에 들으니 30원씩 주고 일행 몇 사람도 체험
을 했다고 하더라. 이어서 남 봉 정상에 오르니 5시 25분이다. 2.160이라 새겨진 푯말이 있는데도 석공이 표지판 하나
를 또 새기고 있었다. 물으니 실제 높이와 달라서 새로 새긴다고 했다. 푯말 옆에 바위가 파인 곳에 물이 고여 있는
데 ‘앙천지’ 라 부른단다. 케이블카 시간이 없다고 독촉을 하기에 내려와 서봉으로 향하는데 앞선 팀 모두가 기다리
며 대단하다고 반겨준다. 서 봉에 오른 시간 5시 50분, 2.086.8m , 이 서봉을 연화봉이라 부르고 동봉은 일출이 좋다
고 ‘朝陽’, 남봉은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습이라고 ‘落雁’ 북봉을 ‘五雲’ 중봉을 ‘玉女’ 라 부르며, 동서남북
과 중봉이 꽃잎과 같이 생겼다 하여 전체 화산을 연화 산이라고도 하는데 중화 五嶽중에 서악에 속한다. 어느 하나 절
경 아닌 곳이 없고, 하나같이 신선 세계다.
 체했다던 일행도 이제야 원기를 회복하고, “아무리 바빠도 정상 주나 하고 가자”하면서 소주 한 병을 땄었지.
  6시에 하산을 시작했는데 케이블카까지 내려오는데도 50분이나 걸리더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다보니 7시 30분
이 넘어서야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는데. 버스에 올라 식당에 들려 저녁을 먹고 9시에 숙소로 가는데 도로 보수 공사
로 교통이 정체 되어 기사가 갓길로 곡예운전을 했는데도 12시 30분에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단다. 
         제 3신
  2007년 7월 28일 토요일   
8시 모닝 콜, 식사를 마치고 9시부터 시내 관광을 나서는데 비가 내리고 있다. 10여 분간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碑
林博物館’. 비석을 숲처럼 많이 모아놓았다는 뜻이다. 3000여점의 비석이 진열되어 있다는데 그 가운데에 13경을 새
겨놓은 비석, 안진경 친필의 ‘顔氏家廟碑’, 등이 눈에 띄었고 현판의 글자에 모자가 없다는 의미로 碑 자 위의 삐
침 점을 없이 쓴 임측서의 친필 설명을 들으며 관운장과 조조 사이의 사연의 한시를 대나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특
이하여 한 점을 쌌었지.
  10시 40분에 박물관을 나와 화청지로 이동하는데 길가에 석류나무들이 석류를 매달고 섰는데 간혹 ‘석류기지’란 
간판이 보여 물으니 이 지역 특산물이라 하는구나. 12시에 화청지에 도착 했는데 양귀비로 자처하며 차려입은 아가씨
들이 사진 모델이 되어 돈을 뺏으려 드는데, 몇 해 전 들렸을 때의 모양은 찾아볼 수 없게 변해있더라. ‘華淸宮望京
門’을 들어서니 ‘長生殿’ ‘神女亭’ ‘小瀛洲 ’ ‘龍后船’ ‘御 湯’ ‘貴妃池’ ‘星辰湯’ ‘夕佳樓’ 등의 
현판이 눈에 들고, 바위굴 속 제 1탕 앞 안내판을 보니 ‘彌山溫泉은 6000년 전에 발견 되었으며 수온은 43도 유량은 
1140톤으로 의료효과가 좋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지.  ’金沙洞‘이라 써 붙인 곳에 들어가니 돈을 주고 족탕을 하는 
곳이더라.
  오후 1시에 다시 출발하여 ‘興盛國際大酒店’이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300원 달라는 것을 100 원으로 깎아 
‘三不樂’이란 두인을 하나 새겼는데 에누리가 심하더구나. 일행 중에 ‘삼불락’의 뜻을 묻기에 이렇게 대답을 해줬
지. “사람이 누려야 할 세 가지 낙이 있는데 그 첫째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이요, 둘째는 형제 부모
가 함께 사는 것, 셋째로 영재를 얻어서 훌륭하게 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나는 이 가운데 하나도 못했으니 三不樂이
라 한다.” 고 했더니 웃더군. 
  珍珠 판매점으로의 쇼핑 순서였는데 의무적으로 40분간을 머물러야 된다고 하여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앉아있는 것
도 고역이더라. 3시13분에 빠져나와 진시 황 능으로 이동했는데 10  여 년 전에 조합 임원들을 데리고 왔을 때와는 전
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어. 가는 곳마다 몇 해 사이에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고 관광객이 넘쳐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관광산업에서조차 우리는 따라갈 수 없음을 보게 되니 두려운 생각이 들더라. 정돈된 계단을 밟고 올랐다가 내려와
서는 공연을 관람하고 그들을 모델 삼아 사진들을 찍은 후 4시에 차에 올라 용마 발굴 전시장으로 옮겼는데, 여기 역
시 상전벽해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더구나. 오후 4시에 도착하여 걷기를 한참, 15분간 영화를 보는데 건설하는 장면, 
진나라가 망하자 능속에 묻힌 보물을 찾으러 이 곳으로 들어와 불을 지르다가 받침목이 불에 타 무너져 묻혀죽는 광
경, 물이 귀한 이 곳에서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발굴하는 모습들이었지. 이어서 병마의 토용들을 보았는데 
전에 왔을 때는 갑옷과 옷의 색깔이 선명했는데 지금은 모두가 산화되어 황토색으로 변해 있더군. 그래서 나머지는 발
굴을 하지 않고 묻어두고 있다고 한다. 능과 능을 지키는 토용 갱을 여산이 둘러싼 이 자리에 정하고 진시황이 등극하
면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죽은 뒤 2년간을 계속하여 지하궁궐을 짓고는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안에 들었던 사람
들 모두를 살해 했다고 하며, 영원히 보존키 위하여 지하 40m부터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었으므로 지금까지 도굴을 당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분서갱유를 비롯하여 가진 폭군 노릇을 다 했는데도 중국 사람들은 천하를 통일했다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받들고, 또 관광 명소로 삼아 즐기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관람을 마치고 나와 6시 15분에 ‘아리랑’식당에 들려 차의 종류와 효능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식으로 식사를 하고
는 7시 30분에 출발하여 내일 태백산 등반을 위해 고속도로를 달렸지. 9시 40분에 휴게소에 들렸다가 11시에 ‘태백
산’호텔에 도착했단다. 호텔이라고는 하나 시설은 보잘것없었는데 이런 산골에서 더 이상의 호사를 바람 무리일 것이
란 생각이 들더군. 
       제 4신
  2007년 7월 29일 일요일
  일찍부터 서둘러 8시 15분에 출발하여 9시에 버스에서 내려 셔틀 버스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9시 15분에는 연화폭
포, 9시 30분에는 ‘別有洞天’ ‘世外桃源‘이라 바위에 크게 새겨져 있는 절경에 내려 사진들을 담고는 108번 굽이
진 도로를 올랐는데, 지난번 화산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 같으면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경사도라도 꺾어 오
르도록 하여 평지를 가는 느낌이라 해발 2800m를 올랐어도 기압 차로 인한 귀 막힘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런 것
에서도 앞날을 내다보는 ’만만디‘의 대국 기질을 느끼게 하더군. 반대편 절벽에 잔도(사다리길)가 남아 있어 삼국지
에서 조조가 서촉으로 가는 길이 험하여 농 땅을 취하고는 촉 나라는 바라만 보았다는 ’得隴望蜀‘의 구절이 생각나
더라.
  10시 27분에 케이블카 타는 장소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씩 타고 해발 3200m까지 약 40분이 걸리도록 천천히 올라가는
데, 고산 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산 정상까지 푸른 숲이 욱어져 경치를 만끽할 수 있어 좋더라고. 
3200m 지점에 내려 3500m까지 걸어서 오르는데 거의 고산 증 현상은 느껴지지 않았지, 푸른 나무들이 많아서 탄소동화
작용을 하면서 내어놓는 산소가 많은 탓이리라 생각 되더라. 일본의 후지 산, 대만의 옥산과는 대조적이었어. 북을 놓
아두고 돈 받고 치게 하는 ‘拜仙臺’(3300m)라는 곳을 지나 12시에 외국인으로서는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3511m 지
점에 이르니 ‘天圓地方’이란 안내판이 넓게 설치되어 있고 옆에는 ‘秦嶺南北分岐點’이라 쓴 돌을 세워 두었는데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고 정상 주를 나눠 마시고 내려와야 했단다. 3767m의 정상에는 경치 좋은 호수도 있다는데 군사
시설이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더는 갈 수가 없었지. 12시 25분에 하산을 시작하는데 두 사람씩 밧줄에 매달려 스릴을 
즐기며 내리는 시설이 있어서 장난 끼가 발동하여 4000원을 주고 타 봤는데 짙은 안개 속이라 아무것도 볼 수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곤돌라 타는 장소에 와버렸단다. 오후 1시 30분에 곤돌라에서 내리니 비가 쏟아지고 있는지라 식당에
서 밥을 먹는데도 비좁아 애를 먹었지, 다행히 밀가루 전병과 산채 나물들이 입에 맞아 비벼서 배불리 먹을 수 있었구
나.
  비 때문에 남은 산행을 포기하자는 의견들이 많았으나 산을 즐기는 손 단장이 밀어붙여 일행 중 11명은 일곱 봉우리
로 이루어졌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칠여 봉’을 오르기로 하였다. 오후 2시 20분에 오르기 시작하여 빗속을 걷는데 
비옷을 입었는데도 등이 젖어왔지만, 낙동정맥 종주 팀에겐 이 정도는 종종 있는 일이라 미끄럼만 조심하면 되는 일이
지. 얼마를 오르내렸을까? 범상치 않은 바위가 버티고 있었는데 내려오고 보니 그곳이 마지막 봉인 칠봉이었더군. 내
리던 비가 멎고 안개를 비집고 얼굴을 내어 미는 절경에 탄사를 보내며 며칠 전 발표회 때에 태극권 안무를 받으며 불
렀던 각시조창 이태백의 시 ‘봉황대상 ’을 불렀더니 기가 솟아나는 듯 하더라. 산행 가이드는 중국 아가씨가 했는
데 상냥하고 재치 있는 몸짓으로 일행을 즐겁게 해 주었으나 이 등산로에는 경험이 적어 길이 헷갈리는 바람에 캄캄
한 굴속을 사다리를 타고 내렸는가 하면 몸 짙은 한 사람이 썩은 나무다리를 기어 건너다가 한 가닥이 부러지는 통에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하여 또 다른 추억을 만들기도 했단다.
  앞에 가던 가이드가 소리를 치기에 내려다보니 찻길이 보이고 곧 이어 현지 가이드가 마중 차 올라와 기다리고 있었
다. 5시 20분, 2086m의 홍화평 주차장에 도착하여 기다리는 사람이나 빗속 산행을 강행한 사람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
며 손을 맞잡았지. 경사 길을 내리는 차들의 라이닝을 식혀주는 물 호수로 옷과 신발을 씻고는 차에 올라 주차 장소
에 오니 6시 20분, 차에 올라 서안으로 향하였다. 
  서안에 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8시 50분인데 9시부터 공연하는 당나라 고전 무용 공연을 관람키 위하여 바로 옆에 
자리한 ‘陽光麗都大劇院’으로 갔는데, 공연 내용들이 볼만하여 비와 땀에 절인 옷 때문에 바로 숙소로 갔으면 했던 
생각이 사라지더군. 삼층으로 된 공연장에 관객들이 가득 찼고, 한화로 25.000원 하는 입장료 외에도 음식값이 꾀 비
싸다고 하니 엄청난 수입이 되어 보였는데, 중국의 신흥 재벌 개인 소유라는 구나. 주위의 주차 공간까지 사버려 일반
인들은 주차장이 없어 불편함이 많다고 한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무질서한 현상이라 여
겨진다. 교통질서도 역시 그러했고.   
  10시 10분에 공연장을 빠져나와 발 마사지를 하러 갔는데, 전에 받았던 바와는 모두가 좋더라는 평이 나올 정도로 
잘해 주더라. 11시 45분까지 받고 나와 숙소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드니 태평성대가 따로 없더군.
         제 5신
 2007년 7월 30일 월요일
  4박 5일 마지막 날이다. 잠이 너무 일찍 깨어졌으나 옆 사람에 피해가 될까 싶어 뜬 눈으로 구르다가 7시가 넘어서
야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겼다. 8시 30분에 아침을 먹고 9시 30분에 시내 관광을 나섰다. 먼저 도착한 곳이 ‘대안 
탑’, 전에 왔을 때는 탑하나 덩그러이. 있었는데 박물관 까지 지어서 삼장법사의 행적을 조각 작품으로 전시를 해 놓
았고 주위를 모두 당나라 거리로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삼장 법사가 천축 국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대안 탑, 처음 쌓은 것은 허물어지고 측천무후가 더 웅장하게 이룬 것이 지금의 탑이라고 하는데, 삼장법사
가 사막에서 길을 헤맬 때에 기러기가 안내해 주어서 이름을 큰 기러기라는 뜻의 ‘대안 탑’이라 했다는구나. 
  10시 20분에 나와 이동한 곳은 ‘금강산’이란 북한의 판매장, 한복을 입고 설명하는 북한에서 나온 부인은 말솜씨
도 있고 품위도 갖췄더라. 자기네의 얼굴인데 아무나 내보내겠나.
여기서는 동족애가 발휘 되는지 모두들 한두 가지씩 사는데, 상비약으로 ‘우황청심원’ 한 알을 사려고 하니 총무를 
맡은 이상권 후배가 선물 한다며 돈을 대신 내는구나. 이 번 행사에서 이 아버지를 위해주는 마음들이 모두 이러했단
다. 아직은 의로움이 살아있다는 증거지.
  11시 50분, 실크 매장에 도착했으나 시간만 때우고는 공항 근처로 가서 점심을 먹은 후 출국 수속에 들어갔지. 4시
에 이륙하고 4시 40분 기내식이 나오고, 6시 40분에 김해공항에 도착, 짐을 찾아 7시 10분에 김해를 빠져나왔단다. 
차 중에서 마이크를 잡고 따뜻이 대해준 일행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메모해둔 9수의 한시를 읽어주며 기억들을 
되살리게 했더니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더구나.
  포항 연화재로 우회 하여 물레방아 식당에서 무사귀환 축배를 들며 저녁을 먹고 출발지에 내려 차를 몰고 집에 돌아
와 이 글을 적는다.
             
출처 : 정자 솔
글쓴이 : 정자 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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