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岳山環縱走(백악산환종주)♣♡*
백악산을 고리 돌아 달리고
百岳他云白岳山:백악타운백악산
境佳自備益佳環:경가자비익가환
玉樑瀑布靑嵐裏:옥량폭포청람리
忠北高原碧落間:충북고원벽락간
頂上石奇爭景絶:정상석기쟁경절
大王峰壯致情頑:대왕봉장치정완
茂林蔽日庚炎逐:무림폐일경염축
警報災難我不關:경보재난아불관
백 개 봉 뜻과 달리 또 한 이름 흰 바위산
스스로도 아름답고 주위 환경 더욱 좋다.
옥대들보 옥량폭포 아지랑이 어렸는데
충북의 알프스가 하늘가에 놓였구나.
정상의 돌 기이하여 절경을 다투는데
대왕 봉 웅장함은 완악함을 다하누나.
무성한 숲 햇볕 가려 삼복더위 쫓아냄에
휴대폰 재난경보 나와는 관계없네!
2018. 7. 15.
*♡♣대정이 백악산을 찾다♣♡*
입석리(상주, 화북)-물한이골-수안재-대왕봉-백악산
-846봉갈림길-옥양골-옥양폭포-삼송교
2018년 7월 15일 일요일.
06시 20분에 짖을 나와 고속도로 입구 관리사무소 앞에 승용차를 주차해두고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라 달려 07시 30분경에 영천휴게소에 들려 아침밥을
나눠먹고 08시 40분에 낙동강구미휴게소를 거쳐 산행 들머리
화북초교 입석분교 앞에 도착하니 09시 44분이다.
채비를 갖추고 단체 사진을 촬영한 후 10시나 되어서야 산행이 시작되는데,
한동안 시멘트포장도로로 지루하게 걷게 되는데, 오른쪽으로 나란히 이어진
산 능선을 보면서 ‘산 능선을 따라 등산로를 내어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약 20분을 걸어서야 산길로 접어들고, 물안이골의 맑은 물 흐름을 따라
나있는 길은 대체로 평이하여 무더운 여름 날씨인데도 쉬기도 자주하여
오르는지라 큰 어려움 없이 수안재에 도착하니 10시 54분이다.
오늘은 선두에 따라붙지 않고 정맥 동기 ‘조금진’과 보조를 같이 하기로
하여 사진도 찍어주며 속도를 조절해 부처바위에서도 포즈를 취하며 걸어
11시 58분에 대왕봉삼거리에 도착해 배낭을 벗어놓고 대왕봉으로 향한다.
12시 05분에 대왕봉에 도착해 세워진 돌탑을 짚고 사진을 담은 후 옆
바위로 옮겨 서서 지름시조 한 가락을 토해낸다.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지
소리도 높고 클 뿐 아니라 내 목소리 맑음에 내가 놀란다. 만약 경창대회에
나가서 이 정도라면 가는데 마다 대상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오니 뒤따라들 와서 점심자리를 펴고 있어 점심을 먹는데,
‘이명희’가 이것 저것 집어 날라다 주어
준비해간 도시락은 고스란히 또 남는다.
이 지역 산들이 거의 그러하듯 암봉들이 많아 간혹 힘을 빼는 곳도 있게
마련인데, 밧줄을 드리워 놓거나 계단을 설치해 놓아 큰 무리 없이
진행하여 13시 17분에 정상에 도착한다.
해발 858m인 이 백악산(百岳山)은 남북으로 길게 퍼져 있는
속리산국립공원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의 접경을 이루고 있다. 북서에서 남동으로 3km 남짓
뻗어 있는 산등성이에 기암괴봉이 이어지고 기묘한 형상의 옥양폭포와
]어우러진 고사목이 절정을 이루며 물안이골, 큰골, 옥양골,
대방골, 물탕골, 숨골의 계곡들도 좋다.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백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백악(百岳)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속리산 쪽에서 바라보면 백악산의 남면과 서면 여러 곳에 하얀
암벽이 보여 하얀산 이란 뜻의 백악산(白岳山)으로 표기도 한다고 한다.
이 산은 앞서 두 차례 오른 기억이 있는데, 2006년 늦가을에 올라 보고
적은 한시가 ‘천일천수’381페이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百岳山中百樣峰: 백악산 가운데에 백 가지 봉이 있어
汽車巖頂特雄容: 정상의 기차바위 특별하게 웅장해라.
石門寺境團團佛: 석문사 경내에는 둥글 둥글 부처 많고
國立公園鬱鬱松: 속리산 국립공원 소나무 울창하다.
乍雨林間蟬語歇: 잠깐 잠깐 내린 비에 숲속 매미 소리 멎고
登豊野外稻香濃: 풍년 든 들판에는 벼 향기가 짙게 이네.
颱風散散渠威勢:‘산산’ 이름 붙인 태풍 그 위세 대단하나
泉石膏肓敢不攻: 자연 찾아 즐기는 병 감히 어찌 못하노라!
그 당시에는 조그마한 정상 석에 가로로 표기돼 있었는데 지금은 큼직한
자연석에 세로로 적어놓은 것 외에는 뒤를 받친 기차바위는 변함없이 맞아준다.
뒤따르며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거지’하며 반기는 ‘금진’에게
‘백개 봉우리는 아직 멀었다.’며 고도를 낮춰간다.
14시 23분에 ‘솥뚜껑바위’에 도착하고 나니 ‘이숙주’를 올려놓고
사진 찍어주던 기억이 떠오른다.
15시 13분에 드디어 옥량폭포(玉樑瀑布)에 도착하는데, 이미 다른 팀들이
점령하고 있어 바로 아래로 내려 알탕을 하는데 물이 깨끗지 못하다.
옷을 갈아입고 곧 주차장에 도착하니 15시 35분이다.
마침 구미에서 왔다는 ‘생명사랑산악회’가 이웃하여 하산주 자리를
하게 됨에, 안주를 얻어 나르더니 끝내는 나를 소개하여 불려가서 마이크를
잡게 함에 백두대간종주시에 역시 구미팀과 대관령에서 하산주를 같이
하게 되어 양쪽이 늘어선 가운데 대표해서 인사했던 기억이 떠올라 녹음을
재생하기도 하고, 참석도 못하면서 최정식 고문이 보내온 회가 풍부하여
남은 도시락을 가져다 비빔밥으로 해서 먹으며 시원한
챗국과 수박으로 또 다른 즐거움을 만든다.
*♡♣黔驢之技(검려지기)♣♡*
黔州(검주)는 나귀가 없는 땅이라 어떤 사람이 나귀를 그 곳에 가져다
야산에 풀어놨는데 호랑이가 보고 대단히 무서워했다. 호랑이가 두려워하며
나귀 주위를 이리저리 배회했는데, 귀가 뒷 발로호랑이를 찼다.
호랑이는 나귀의 재주가 그것 뿐인 것을 알고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버렸다는 고사. 즉, 별볼일 없는 기량을 뽐내는 것을 말한다
*♡♣曠日持久(광일지구)♣♡*
전국시대 말엽인 BC265년, 연(燕)나라가 송(宋)나라 출신 영분(榮蚠)을
고양군(高陽君)으로 봉한 뒤 군사를 일으켜 조(趙)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자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이 제수(濟水) 동쪽의 노(盧), 고당(高唐),
평원(平原) 등 3개 성읍 내에 있는 57개 시읍을 제(齊)나라에 떼어 주면서
제나라의 안평군(安平君, 전단(田單), ▶ 화우지계(火牛之計) 참조)이
군사를 통솔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가 평원군(平原君)에게 말했다.
“나라에 이토록 인물이 없다니. 왕이 안평군에게 군사를 통솔하게 하려고
제동의 3개 성읍에 있는 57개 시읍을 제나라에 떼어 주려 하고 있소.
이 땅은 그대가 적국과 싸워 적군을 깨뜨리고 적장을 죽이는 공을 세우고
적국으로부터 떼어 받은 것이오. 그런데도 지금 왕은 이를 제나라에 주고
안평군에게 통솔을 맡기려 하니 나라에 이토록 인물이 없다는 것 아니겠소.
왕은 어찌하여 나더러 통솔하도록 하지 않는 것이오? 나 조사는 일찍이
죄를 짓고 연나라에 머물렀을 때 연나라는 나에게 상곡(上谷)을 지키는
책임을 맡겼소. 그래서 나는 연나라의 통로와 요새를 익히 알고 있소. 백일
내에 천하 제후들의 군사가 다 모이기 전에 나는 이미 연나라의 항복을 받아
낼 것이오. 그런데도 왕은 무엇 때문에 안평군에게 통솔하게 하려는 것이오?”
평원군이 말했다. “장군은 그것으로 됐소. 내가 이미 왕에게 말해서 왕께서
나의 말을 들어준 것이오. 장군은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마복군이 말했다.
“왕이 잘못하는 것이오. 왕이 안평군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제나라가 연나라와
간을 씹어 먹고 피바다를 만들 정도의 원수(茹肝涉血之仇)이기 때문이오.
그러나 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소. 만일 안평군이 어리석다면 절대로 영분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이오. 만일 안평군이 현명하다면 연나라 사람들과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오. 내가 말한 이 두 가지 중에서 안평군은 어느 하나에 처할
것이오. 그렇다고는 하나 두 가지는 다 마찬가지요. 안평군이 현명하다면
무슨 이유로 조나라를 강하게 만들려 하겠소. 조나라가 강해지면
제나라는 다시는 패자가 되기 어렵소.
이제 안평군은 강한 조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의 공격을 막게 되었으니
수년 동안 세월을 보내며 시간을 끌면서 사대부와 종군하는 자들에게 도랑이나
보루를 만들게 하여 힘을 소진케 하고, 전차와 갑주, 화살, 군기 등을
마모하여 훼손케 하고,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텅 비게 만들고, 두 나라 군사가
교전으로 모두 지쳐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되면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갈
것이오. 두 나라 군사들을 모두 피폐케 만들 것이 틀림없는데도 이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 없소.(今得强趙之兵, 以杜燕將, 曠日持久數歲, 令士大夫餘子之力,
盡於溝壘, 車甲羽毛裂敞, 府庫倉廩虛, 兩國交以習之,
乃引其兵而歸. 夫盡兩國之兵, 無明此者矣.)”
안평군이 이끄는 군사는 솥을 걸어 밥을 지어 먹는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3개
성읍을 얻었다. 그러나 큰 성읍이라 한들 백 치(雉)를 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과연 마복군 조사가 말한 그대로였다. 이 이야기는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에 나온다. ‘광일지구’는
‘광일미구(曠日彌久)’라고도 한다. ‘치(雉)’는 성벽의 길이 3장,
높이 1장의 면적을 말하는 단위이다.
松亭(정자 솔) 朴載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