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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8차 솔나불: 감암산, 고사성어-傷弓之鳥, 相思之病

정자 솔 2018. 11. 2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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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嵁巖山登攀(감암산등반)♣♡* 
 
 감암산을 등반하고

嵁巖山勢怪巖多:감암산세괴암다
麴子堆眞獨特峨:국자퇴진독특아
疑獸疑禽形絶具:의수의금형절구
或高或廣氣天摩:혹고혹광기천마
四圍重壑鎖雲影:사위중학쇄운영
八繞衆峰屛錦羅:팔요중봉병금라
匍匐攀繩聊陟頂:포복반승료척정
咆哮浩氣載詩歌:포효호기재시가
감암산세 기괴하게 생긴 바위 많은지고
그 가운데 누룩 덤이 홀로 특히 우뚝하네.
짐승 같고 새와 같은 모양 절경 갖추었고
혹은 높고 혹은 넓어 기세 하늘 닿을 듯 다.
사방 두른 여러 골짝 구름 그늘 잠겼는데
에워싼 여러 산봉 비단 병풀 친 듯하다.
밧줄 당겨 기어올라 정상 밟고 높이 서서
호연지기 시에 실어 노래 불러 외쳐본다!
        2018. 11. 18.


 *♡♣감암산을 오르고♣♡* 

대기마을-거북바위-누룩덤-칠성바위-828봉분기점-정상-원점회기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인연 맺은 산악회들을 고루 찾다가 보니 동지산악회는 이해들어 한 번도 찾지 못했고, 
다음 달은 또 대간종주시 동고동락한 호산알파가 100회 산행을 하게 되어 참가 약속을 
한 바라 이달만은 꼭 참석키로 마음먹고 오주선 회장 기념 작품을 준비하여 참석하게 된다.
  07시에 집을 나와 고속도로 나들목관리사무소 앞에 승용차를 주차해 두고 
돌아 나오니 벌써 버스가 와서 선다. 
 07시 30분에 영천휴게소에 들려 아침밥을 나눠먹고 다시 출발해 09시 34분에 
댐 관리시설 공원에 들려 쉬었다가 산행 들머리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어간다.
 몸을 풀고 곧 산행이 시작되어 한동안 시멘트 포장도로를 걷다가 
10시 32분 목교를 지나면서부터 산길로 접어든다.
  10시 50분에 거북바위에 도착하고 다시 올라 11시에 이정표가 세워진 능선에 
올라서서 우람한 바위 군락에서 사진을 담는다.
  곧 이어 전개되는 가파른 암릉, 양쪽으로 쳐놓은 밧줄이 없으면 위험하다. 
밧줄에 매달리며 올라서니 누룩덤이 시작되는데, 강영익, 조경래 후배들과 
보조를 같이하며 누룩덤에 올라서서 포즈를 취하니 11시 25분이다. 
바위 틈새를 드나들기도 하고 기기묘묘하게 기대고 얹혀 진 바위들에
 눈길을 주며 주위의 황매산 조망도 즐긴다.
 이 감암 산을 황매산의 아들 산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한자 표기를 
甘闇山 혹은 嵁巖山이라 쓰고 있는데, 전자는 달고 어두운 뜻이니 잘못 쓴 것 같고
  후자의 嵁자는 산 험할 감, 바위 울퉁불퉁할 감, 그리고 장자(莊子)가
 大山嵁巖之下라 하여 산이 높고 험한 바위산이라 표현한 고사도 있어 
후자의 표기가 산 형세로 보아 맞다 고 여겨진다.
  12시에 828봉 분기점 표식과 이정표에서 자취를 남기고 정상을 향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바위는 적어지고 흙도 밟게 된다. 
12시 16분에 정상에 도착해 사진을 담고 버티고 서서 지름 한 가락을 
토해내고서야 점심자리에 합류한다. 
 점심을 먹고 나니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져 춥기까지 한지라 서둘러 
올랐던 길로 되돌아 원점 회귀릏 한다. 
12시 50분에 내리기 시작하여 13시 06분에 분기점을 지나고 13시 40분에 
거북바위, 13시 50분에 목교를 지나 묵방사 입구에서 웃통만 벗고 혼자 몸을 씻고 
있으니 묵방사 쪽에서 내려오던 젊은 산행 인이 보고는 춥지 않느냐고 묻는다.
 윗옷만 갈아입고 주차장에 도착해 하산을 마치니 14시 10분이 된다. 
  하산주 자리에서 축배를 들며 작품도 전달하며 오늘 일정도 마무리가 된다.    


 *♡♣傷弓之鳥(상궁지조)♣♡* 

[출전]전국책 초책(戰國策 楚策).
활(弓)에 상처(傷處)를 입은 새(鳥)는 굽은 나무만 보아도 놀란다는 뜻 으로, 한번 
놀란 사람이 조그만 일에도 겁을 내어 위축됨을 이르는 말. 
'화살에 맞아서 다친 새'라는 뜻으로, 예전에 일어난 일에 놀라서 작고 하찮은 일에도
 매우 두려워하여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초책(楚策)〉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B.C.475-B.C.221), 초(楚)·조(趙)·연(燕)·제(齊)·한(韓)·위(魏) 등
 여섯 나라는 합종책으로 최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하려고 공수동맹을 맺었다. 
조(趙)나라에서는 위가(魏加)를 초나라에 보내 초나라의 승상(丞相) 
춘신군(春申君)과 군사동맹에 대하여 논의하게 하였다. 위가는 협상 중에 초나라의
 임무군(臨武君)을 군대를 총지휘할 장군으로 정하였다는 춘신군의 말을 듣고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적이 있는 
임무군은 늘 진나라를 두려워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위가는 춘신군에게 "위나라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왕과 함께 산책 길을 걷고 
있을 때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고 화살을 메기지 않고 시위만 당겼는데 맨 뒤에서
 날아간 기러기가 놀라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명궁은 '이 기러기는 지난 날 제가 쏜 화살에 맞아 다친 적이 
있는 기러기입니다[傷弓之鳥].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맨 뒤에서 겨우 날아가며 
슬프게 우는 소리를 듣고 알아보았습니다. 활의 시위만 당겼는데 그 소리에 놀라 높이
 날아가려고 하다가 땅에 떨어졌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진나라와 
싸워서 졌던 임무군을 장군으로 임명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소리에 놀라 땅에 떨어진 기러기를 진나라에 패배한 임무군에 비유한 것이다.
 화살에 맞아서 상처가 난 새는 구부러진 나무를 보기만 해도 놀란다는 뜻이다.

 *♡♣相思之病(상사지병)♣♡* 
 
남자와 여자 사이에 못 잊어 그리워하며 고민하는 나머지 생기는  병(病). 
동진(東晉 : 317-420)의 학자이자 문인인 간보(干寶)가 지은 《
수신기(搜神記)에 나오는 말이다. 
“송나라 사람들이 슬피 여겨 그 나무를 상사수라 하였는데, 상사란 말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宋人哀之 遂號其木曰 相思樹 相思之名 起於此也].” 
춘추 전국시대(戰國時代 : B.C.475-B.C.221) 송(宋)나라 말기 강왕(康王)은 주색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광적으로 주색잡기에 탐닉하였다. 심지어 부하의 부인까지도 
넘보았다. 강왕의 시종 한빙(韓憑)에게는 절세미인의 부인 하씨가 있었다. 
강왕은 하씨를 강제로 능욕한 뒤 후궁으로 삼았다. 
한빙이 곁에 있는 한 마음이 편하지 못함을 알고 강왕은 한빙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나서 성단(城旦 : 변방 지역에서 낮에는 변방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무거운 형벌)의 형벌에 처하였다. 
이때 하씨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편지를 몰래 보냈는데, 이것이 강왕의 손에 들어갔다. 
강왕에게 들어간 편지를 소하(蘇賀)라는 사람이
 “당신을 그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고 방해물이 많아 만날 수 없으니 그저 
죽고만 싶을 따름입니다.”라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였다. 
얼마 후 한빙은 아내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내 하씨도 성 위에서 투신하였는데, “임금은 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제 남편과 합장해 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에 화가 난 강왕은 하씨의 유언을 받아 줄 리가 없으며, 의도적으로 무덤을 
서로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부터 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10일 후에는 큰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나무 위에서는 한 쌍의 원앙새가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원앙새를 죽은 부부의 넋이라고 보았고,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상사병이라는 말이 퍼졌다. 
상사병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말할 때 쓰이는데, 지금은
 변하여 괴롭고 견디기 힘든 혼자만의 짝사랑을 말할 때 상사병에 걸렸다고 한다
   松亭(정자 솔) 朴載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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