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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18차 솔나불: 백오동 錦山 시산제,

정자 솔 2019. 1. 2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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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五棟錦山始山祭(백오동금산시산제)♣♡* 
 
백오동 산악회 금산 시산제

錦山萬萬備神奇:금산만만비신기
三八景光他不追:삼팔경광타불추
多島海邊生畵展:다도해변생화전
雙虹門裏韻風吹:쌍홍문리운풍취
菩提庵特祈祥處:보제암특기상처
相思巖能結愛基:상사암능결애기
薦祭皇天無事歲:천제황천무사세
上望臺醉自然詩:상망대취자연시
금산은 무수하게 신기함을 갖췄으니
삼십팔 경, 품은 경치 추종할 산 없음이라.
다도해 바다 풍경 산 그림을 전개했고
쌍홍문 가운데에 운치 나는 바람 분다.
보리암자 특별하게 복을 비는 기도처요
상사 바위 능히 사랑 맺어주는 곳이란다.
무사한 해되기를 황천에 제 올리고
정상 망대 올라가서 자연 시에 취해본다. 
         2019. 1. 27.


 *♡♣백오동의 금산 시산제♣♡* 

2019년 1월 27일 일요일. 
06시 05분에 집을 나와 미명의 승용차에 편승하여 이동사거리에서
 1호차 1호석에 안내받아 앉는다.
07시 20분에 영천휴게소 운전기사 휴식 공간에 들어 아침을 나눠먹고 다시
 출발해 08시 40분에 현풍휴게소에 들렸다가 금산 두모계곡주차장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지난다. 인물상이 세워져 있어 살펴보니 서복(徐福) 상이다
 중국(唐)과 로마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후 
동방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방실크로드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이다.
여기 말하는 동방 실크로드보다 1500년 앞서 이지역의 해상 교역로를 개척하여 수많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있으니, 중국 진(秦)나라 사람인 여기 선 서복(徐福)이다.
서복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와 회남형산(淮南衡山)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는 서복을 서불(徐巿)이라고도 부른다. 서불의 불(巿)은 
두건(巾)을 쓴 제사장의 의미로 두건에 한 일자(一)가 들어 있는(一巾) 글자이다.
 이는 두건에 ‘냄비뚜껑’을 올린 시(市)와 비슷하지만 다른 글자이다. 
불(巿)은 서복의 복(福)과 중국 발음(fu)이 같다.
서복이 BC 219년 진시황의 지시로 바다에 나갔다가 신선 이야기를 듣고 진시황에게 
바다 건너삼신산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해 오려고 했더니 신선이 동남동녀와
 함께 오곡 종자와 백공의 제품을 가져와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여 동남동녀 3000명과 다방면의 기술자(百工)와 뛰어 난 제품을 가지고 
가도 좋다고 하였다.
서복은 BC 210년 진시황이 시킨 대로 60척의 배에 5000명의 각 분야의 기술자, 
3000명의 동남동녀와 함께 3년 치 식량을 준비하여 진황도를 출항하였다고 한다.
 서복 일행은 한반도의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고 한다.
 일본은 평원광택(平原廣澤 넓은 평야와 습지)의 땅에 기후가 온화하고 풍광이
 수려하며 원주민이 착해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어 돌아가지 않았다
(徐福得平原廣澤 止王不來)고 한다.
학자들은 서복이 불로장생에 눈이 어두워 판단력이 희미해진 진시황을 속여 신천지에 
필요한 처녀 총각 다양한 기술자 오곡의 종자 등을 대거 싣고 기획 이민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천문지리에 능한 서복은 진시황이 포악하여 진나라가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예견하였는지 모른다.
 그 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폭정을 이어가 백성들이 탈출하고 천하를
 통일한지 15년 만에 그리고 서복이 떠난 지 4년 만에 나라를 잃은 것을 보면 서복의 
선견지명을 알 수 있다.
지금 일본의 기술이 한중일 3국 중에 띄어 난 것도 당시 중국의 백공(百工)들이 
일본에 정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부에서는 서복이 떠날 때 많은 서책을 
준비해서 가지고 나와 진시황의 분서(焚書)를 미리 피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중국에도
 없는 유학 및 의약관련 서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서복이 도착한 곳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신구시(新宮市)에 가면 서복이 도착하여 살다가 죽었다하여 서복의 무덤이 있고 
서복이 좋아했다는 서복주(徐福酒)도 팔고 있다.
일본의 하타(秦 또는 羽田)씨는 서복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진(秦)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붙인 이름(姓)이라고 한다. 과거 일본의 하타 쓰토무(羽田 孜) 총리가 
일본 서복학회의 회장이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학자들은 서복은 선진 중국 문물을 가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고대 이민 
집단으로 본다. 한반도의 서복 유적지에는 서불과차(徐巿過此) 또는 
서복과지(徐福過之) 즉 ‘서복이 이곳을 거쳐 갔다.’라는 의미의 네 글자가 바위에 새긴
 명문이 많다. 그리고 제주도의 서귀포(西歸浦)도 서복이 조천포(朝天浦)에 상륙하여 
불로초를 구하여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올랐다는 표시이므로 한반도는 
서복 일행의 경유지로 본다.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 233-297)가 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한반도의 
진한(秦韓 辰韓)은 마한 동쪽으로 진(秦)에서 옮겨 온 유민이 살던 나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보면 배를 타고 작살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고래잡이(捕鯨) 그림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서복이 일행 일부를 지금의 경상도에 남겨 진한을 
건국케 하고 고래잡이 등 사냥의 선진 기술을 가진 백공의 일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15년 9월 한반도의 남쪽 섬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의 서복문화
 전문가들이 모여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를 창립했다. 한중일의 서복문화 관련 지역을 순회 
교류하여 서복 일행이 한국과 일본에 미친 문화 인류학적 막대한 유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는 무슨 근거가 있어 상을 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시산제를 올리기로 하는데,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날씨도 포근해
 질서 정연하게 정성을 다해 제를 올리며 기도한다.

       維歲次
檀帝紀元四千三百五十二年一月二十七日백오동山岳會長 安大烈 
     삼가 밝혀 告하나이다   
   白頭大幹縱走를 五次로 마친 健脚들을 바탕 되어 백오동 이름으로 創立된  본 山岳會가
   幾百의 龍脈을 달리고 數千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海內外 特別山行을 가지며 國土를 
   누비고 友情을 다져 온지 於焉 十餘星霜 132次    定期山行이 되었나이다. 
   瑞氣 疆土에 어리고 希望이 온 누리에 가득 찬 黃金돼지의 해 己亥新年을  맞아  38경을 
   거느리고 이 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을 품고 다도해 해상공원을 굽어보고 있는 
   비단산인 錦山을 찾아 그동안의 보살펴주심에 感謝하고 한해의 安全山行을 祈願하는 
   始山祭를 올리나이다.
天地神明과 錦山 神靈께서는 굽어 살피사와 이 해에도 즐겁고 오르는 산마다가 안전하고
    찾는 날마다가 청명하여 會員의 健康과 家庭의 幸福이 本會의 無窮한 發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保佑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簡素한 祭羞를 올리오니 降臨하사와 
歆饗하시옵소서. .>

의례는 질서 정연히 마쳤으나, 여러 산악회, 90명 많은 인원이 함께 한 탓이겠지만 음복 나누는 
절차에서는 통제 불능이다. 구릅별로 자리해 앉아 점심자리를 펴면 풍부한 제물이라 집행부가 
고루 분배 할 수도 있으련만 각자 집어 나르다 보니 애쓴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떡 한 조각을 얻어 들고 먹는 둥 마는 둥 등산을 서둔다.
  12시 11분에 선두를 뒤따라올라 12시 29분에 암 각화 바위를 지나 13시 07분에 통천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돌아올라 부소암(扶蘇巖)에 도착하니 13시 10분이다.
  언덕에 올라 부소암을 배경으로 사진을 담고 곧 능선 헬기장에 올라서니 13시 20분이다.
 13시 27분에 정상 석 (명승 제 39호 남해금산)에 기대어 사진을 담고  망대(701)에 올랐다가 
아래로 내려와 681m 금산 표석이 있는 바위에 올라서서 창 두 가락을 토해내는데 평소에는 
내기 힘든 고음이 생각대로 나온다. 금산의 기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일행 젊은이들이 알아보고 막걸리를 권하기에 받아 마시고 사진도 부탁한다.
  내려와 14시에 보리암으로 갔다가 화엄봉을 거쳐 올라 단군성전도 살피고 
 다시 헬기장으로 오니 14시 09분이다.
  14시 17분에 상사 암으로 내려갔는데, 수도 없이 찾은 금산이나, 여기는 처음이라 적힌
 내용을 읽어보니 가난한 집 총각이 이웃 부잣집 처녀를 사모하다 상사병이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이 바위위에서 소원을 풀어 줬다고 하는데 조선조 19대 숙종때라고 명시한 걸로 보아 
실화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바위  뿐인 움푹 파인 가운데에 
사람 두 셋 누울만하게 잔디 깔린 평지 공간도 있다.
 다시 올라와 헬기를 지나 쌍홍문 쪽으로 하산을 시작하여, 14시 37분에 제석봉, 14시 41분에
 쌍홍문을 통과하여 장군 암을 지나내린다. 이 길은 지지난 해에 한림산수회가 올랐던 길이다.
  15시 20분에 하산을 마치고 후미를 기다려 50여분을 버스로 이동해 식당에 들어 두부찌개로
 배불리 저녁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부탁받아 시산제에 관한 유의할 점을 
설명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 앞까지 태워다 준 덕택에 몇 발짝으로 문에 들게 된다. 


   松亭(정자 솔) 朴載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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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정자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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